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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미향 Mar 28. 2024

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빨강, 파랑은 죄가 없다

     

딸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이힐과 예쁜 색깔이 아주 많이 섞인 치렁치렁한 치마를 산 것이었다. 하이힐은 멋부리기 좋아하는 내가 임신복과 운동화에 열 달 갇혀 있는 힘든 일을 끝낸 나에게 주는 표창이었다. 잘 입지 않던, 길고, 예쁜 색깔 많고 치렁치렁한 치마는 누워 있는 아기를 위한 것이었는데 육아와 살림과 학교생활을 함께 해내야 하는 엄마의 바쁜 생활 속에서 아기가 색깔과 움직임을 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기용 모빌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러나 그 딸은 유치원에 가서야 색깔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선가 1,200장 짜리 색종이를 구해 놀잇감으로 주고 어떻게 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채를 ‘빨강’이라는 단어 하나에 우겨넣을 수가 있어? 이걸 어쩌지?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언어의 거친 방식에 당황해서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보겠지 하는 믿음으로.

 두어 해 전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인전을 치렀다. 디귿 자로 열려 있는 공간이라 일반 화랑과는 다른 방식의 작품 선택이 필요했다. 보수적 성향, 공간의 형태, 신작 등의 상황을 고려해 푸른색 100호를 메인 작품으로 하고 다른 작품들을 결정해 나가니 푸른색 작품이 많아졌다. 집에 돌아와 완료된 설치 사진을 딸에게 보여 주었더니 ‘엄마, 어쩌자고 푸른색 작품을 이렇게나 많이 걸었어?’라고 했다. ‘응? 그게 뭐 잘못됐어?’. 딸의 얘기는 대통령 선거 끝나고 2주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푸른색으로 도배하면 어느 쪽에서든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같다는 것. ‘얘, 빨강, 파랑이 뭐 잘못 했는데? 정당보다도 정치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혹, 양대 정당이 서로 빨강과 파랑을 지금과는 반대로 쓴 시절을 기억하시는지?)     

다음날 빨강 정당의 국회의원이 보좌관과 함께 작품을 보러왔다. 보좌관이 ‘의원님, 저는 이 파랑 작품이 너무 좋은데 여기서 사진 찍는 건, 좀 안 되겠죠?’ 하더니 몇 점 안 되는 빨강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노랑 작품 앞에서도 찍었다. 아, 이것 참......     

매일 화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꼭 물었다. ‘어느 쪽 정당에서 일하시나요?’ ‘저, 정당 일 하는 사람 아니예요.’라고 매번 답해야 했다. 아마도 정치적 성향을 물어본 다음에 자신의 성향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아, 이런......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느 쪽 정치성향이세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아, 저는 사안별로 반응합니다만...... 정당들이 다 잘 하지도 다 못 하지도 않으니까요.’ ‘어? 그러셔요. 그럼 그런 화제는 빼야겠군요.’ 허, 어디서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악보에 없다.’고 했다. 색채에도 너무나 많은 디테일이 있다. 기본 색채의 다양한 스펙트럼, 질감, 두께, 밀도,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 만드는 색채들...... 그러니 색채의 이름이 색채는 아니다. 우리 세상살이도 수많은 디테일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원천적으로 옳다는 믿음은 우리의 실체적 삶의 진실과는 유리된, 수많은 오류를 낳는다. 하물며 저편보다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오만이야 말해 무엇 하겠나? 그냥 다르다고 생각하는 겸허함까지는 가야 한다.     


다시 선거철이다. 제게 어느 쪽이냐고 묻지 말아주세요. 저는 수많은 느낌으로 점철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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