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인도에 가다.
드디어 전공 국가 인도에서 한 달을 보냈다. 늘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인도를 향한 꿈과 희망은 라떼 위의 거품처럼 금세 사라졌고, 이틀 동안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내가 경험한 인도를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역설의 나라’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인도는 최악과 아름다움의 양면을 모두 지니고 있는 국가이다. 인도의 길거리에서는 나를 지하 너머까지 끌고 갔다가, 인도의 유적지, 관광지에서는 최악을 잊게 할 만한 꿈과 희망을 선사한다.
한 달 중 15일을 지낼 뉴델리의 대기오염이 심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듣고는 갔지만,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한 발자국 내딛자 순식간에 내 표정이 굳었다. 뿌연 스모그에 숨을 쉬는 게 버거웠고, 질서 없는 차들의 향연 속 경적 소리에 인도에 방문한 것을 후회했다. 조용히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kf94 마스크를 꺼내 쓰고 우버를 타기 위해 공항 근처를 거닐었다. 9시간의 기나긴 항공 여정에 지쳐있는 데에 더해 도를 지나친 대기오염과 경적소리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해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날, 환전을 위해, 한국인을 타깃으로 하여 장사하는 나빈가게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빠하르간지’라는 곳에 있었는데, 사람과 비둘기로 가득하고,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미처 버리지 못한 약간의 희망을 품은 채 환전을 마치는 대로 내 발걸음은 미리 계획해 둔 로터스 템플과 후마윤의 묘로 향했다. 이 건축물들에 도착하자마자 웅장함과 섬세함에 압도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편한 호흡을 방해하던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웅장한 건축물을 더욱 빛나게 했다. 오히려 더욱 신성해 보이게 하는 이 아이러니함. 인도를 ‘역설의 나라’라고 칭한 또 다른 이유이다.
로터스 템플은 연꽃 사원으로, 아름다움과 동시에 신성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부정함의 상징인 신발은 벗어 외부에 두고 들어가야 하며, 사원 내에서는 카메라 사용을 금지하고, 엄숙한 태도로 침묵을 행해야 한다. 인도 길거리의 최악의 경적소리를 겪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마주한 로터스 템플의 정적은 안도와 안식을 선물했다. 그 간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치유이자 대가로 다가왔다.
로터스템플에서 치유받은 마음을 지닌 채 도착한 후마윤의 묘의 웅장함과 신성함은 사진으로는 감히 담을 수 없다. 담으려 해도 도저히 담기지 않는다. 스모그와 함께 직접 눈으로 감상했을 때의 그 감정은 미루어 설명할 길이 없다. 후마윤의 묘에 들어가 보면 내가 정말 작은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무굴 황제 후마윤을 위한 무덤은 정원식 무덤이기 때문에 이 건축물이 다가 아니다. 이것에 다다르기 이전엔 다른 건축물들과 분수, 나무들이 맞이해 준다. 후마윤이 나고 자라며 학문에 정진하고, 죽음을 맞이한 쉐르만달은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을 지닌 채 센트럴파크 같기도 한 정원식 무덤을 거닐며 인도의 향기를 음미한다.
*나시르 웃딘 무함마드 후마윤은 1530-1540, 1555-1556에 재위하였다. 아프간 출신 쉐르 칸 수르가 비하르, 벵갈에서 후마윤에게 도전하여, 1539, 1540에 후마윤과 전쟁을 치렀다. 후마윤은 패배하였고, 그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갔다. 쉐르 칸 수르는 ‘쉐르 샤’라고 칭하며, 수르 왕조를 창시하였다. 후마윤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로 망명하였다. 재위 25년 중 15년을 망명으로 보냈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에서 망명을 보낸 15년 후(1555) 델리 탈환에 성공하였지만, 어이없는 죽음을 겪었다.(뿌라나 낄라, 쉐르만달) - 인도사, 강명남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