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다닐 때마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출장과 여행으로 수많은 유럽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도 한 번도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없었다. 조심성도 있었고, 나름대로의 방어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유럽에서의 첫 가방 분실 경험이 찾아왔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에 탑승한 나는 한국에서처럼 습관적으로 배낭을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부다페스트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내릴 준비를 하려고 선반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가방이 사라졌다. 처음엔 단순한 착각인가 싶었다. 혹시 반대편 선반에 올려놨던가? 아니면 발밑에 내려놨던가?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아, 도둑맞았다.
이미 기차는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었고, 승무원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나는 망연자실한 채 플랫폼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여권과 지갑, 핸드폰은 습관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었다. 하지만 가방 안에는 옷과 개인 용품, 여행 필수품들, 비상금이 모두 들어 있었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경찰서를 가야 하나?"
"여행자 보험이 있으니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나?"
"부다페스트 경찰서는 어디에 있지?"
밤은 깊어가고 핸드폰 배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구글맵을 켜서 경찰서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경찰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다페스트역 직원에게 경찰서 가는 길을 물어보았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 도시에는 단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다. 유럽 최고라는 야경을 감상한 후 내일이면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가방을 도둑맞은 짜증과 허탈함에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그냥 호텔로 가자. 아무것도 하기 싫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짜증과 분노가 뒤섞여, 이 도시에서의 하루를 그냥 포기하고 싶어졌다. "이왕 온 건데, 그래도 좀 돌아다녀 볼까?"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그냥 방 안에서 부다페스트라는 도시 자체를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어차피 하루뿐인 이곳에서, 나는 시간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 처박혀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생 다시 부다페스트에 올 수 있을까?"
가방을 잃어버린 건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이 도시의 아름다움까지 잃어버릴 필요는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부다페스트 야경 명소, 부다 성(Buda Castle)과 다뉴브 강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곳에 도착하자, 그동안의 짜증과 화가 모두 사라졌다. 황금빛 조명이 비친 부다 성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 강.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이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안 나왔으면 후회할 뻔했다."
나는 가방을 잃어버렸지만,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얻었다. 그렇게, 이 도시는 내게 불행과 위로를 동시에 선물한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