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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Nov 10. 2024

여행 4일 차, 맥주 한잔 마시기 어려운 인디언의 도시

Gallup, 뉴멕시코

50대 아저씨들, 맥주 마시다가 다섯 번 스트라이크 아웃 당하다


2일 차 운전, gallup, 540마일(864km), 8시간 5분


어제저녁 Dr. 구로부터 받은 오늘의 목적지는 뉴멕시코의 소도시 갤럽(Gallup). 한국인들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인데 간략히 검색해 보니 인디언 원주민들의 집단 거주지란다. 


첫날밤을 보내며 걱정했던 것들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50대 아저씨 세 명이 한 방에 자다 보니 코골이, 이갈이 같은 수면 중의 문제는 물론 아침에 화장실 사용, 샤워순서 등 출발시간에 지장을 주거나 자칫 하면 감정까지 상할 수 있는 사항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일단 첫날이라 그런지 다들 눈치껏 무난 무난히 진행하고 아침 10시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


친절한 Dr. 구는 갤럽까지 가는 여정에 두 군데 포토스폿도 추천해 주었다. Boulders viewpoints와 Petrified forest national park. 


Exit로 빠져나가 멀리 돌아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게으른 한국 꼰대 아저씨들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해 가는 길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는 두 곳을 추천한 것이다. 그것도 못 미더워 구글맵을 통해 가는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걸 재차 확인한 우리는 가서 잽싸게 사진 한 방씩만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해 질 녘 즘 도착한 갤럽은 특이한 도시였다. 우리 숙소인 Comfort Suite 주변은 미국의 프랜차이즈 식당의 총집합소 같았다. 


맥도널드부터 한국에선 사라진 데니스까지 십 여개의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꽤 큰 규모로 다 모여 있었다. 하루를 묵으며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도시 전체의 활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백인도, 흑인도, 스패니쉬도 아시안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순수 인디언 원주민들의 도시였는데 사람들이 하나 같이 의욕이 없어 보였다. 미국시민인 석헌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 주 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주민들이기에 프랜차이즈에서의 식사가 주를 이룰 것이었고 경제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우린 그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프랜차이즈 식당들 사이에 술 마시는 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특이하게도 근처 카지노 안에 있는 바를 추천해 주었다. 구글맵을 검색해 본 결과도 술을 파는 식당은 그곳 밖에 없었다. 인디언들이 많은 고즈넉한 로컬바를 원했으나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카지노 내에 위치한 Fire Rock으로 향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옴직 한 그 술집에서 우리는 음주역사상 최고로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역시 활력 없어 보이는 중년의 인디언 웨이트리스는 맥주를 주문하는 우리에게 ID를 전부 요구했다. 여권을 방에 두고 나온 나는 스마트폰의 여권사진을 보여줬으나 그녀는 로보트 같은 표정으로 실물여권이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나는 ‘아니 50대에 민증 검사에 뺀찌를 맞으며 까지 이런 곳에서 술을 마셔야 해?’라는 생각에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의 이성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에겐 이곳 말고 대안이 없음을 조심스레 얘기해 주었다. 그래서 난 친구들 먼저 한잔하고 있으라고 한 후 혼자 조용히 호텔로 다시 가서 여권을 가져와야 했다.


그래,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여권을 가져온 나까지 맥주 한잔을 다 비운 우리는 다시 한 잔씩을 추가했다. 그랬더니 그 웨이트리스는 우리 세명의 여권을 다시 요구했다. 어처구니없어 이유를 묻는 우리에게 그녀는 <ID 스캔>을 해야 맥주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했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었다. 알코올 중독이 많았을 이 도시에선 매 술 주문마다 개인 ID를 스캔해서 통제하고 있을 거란 추측을 했다. 좀 귀찮은 일이지만 인디언 원주민들의 슬픈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하고 다시 여권을 제출했다.


그런데 괴이한 일들은 그다음부터였다. 어차피 주문에 시간이 많이 걸림을 눈치챈 빨리빨리 한국인들은 시간 로스를 없애기 위해 맥주 1/3잔이 남아있을 때 잽싸게 다음 잔을 미리 주문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이젠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모든 잔이 비워야 그다음 잔을 주문할 수 있다’라고 했다. 


아니, 이건 ID 스캔 정책이랑 상관없는 거 아닌가?


두 번까지는 이해했지만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먹은 우리는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약간 화도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또 알고 있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 하며 무엇보다 우리에겐 대안이 없었음을.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남은 1/3잔을 다 비웠다. 그리고 다시 맥주 한 잔씩을 더 주문했다. 


그런데 방심하고 있던 우리에게 그녀는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한 명이 맥주 세 잔을 마시면 그다음 잔은 1시간이 지난 후 주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긴 곧 ‘이제 그만 마셔라 이 놈들아’와 같은 말이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최우석이 <시험은 기세다>라고 얘기한 것처럼 <술도 기세다>. 한번 흐름이 끊기면 그 술자리는 더 이어나가기 힘들다는 것은 한국 음주인들에겐 주지의 사실이다. 네 번째 스트라이크를 먹은 우리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GG를 치고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는 없었지만 편의점은 찾을 수 있었다. 술이 부족한 우리는 와인을 찾았으나 알코올에 대한 통제가 강한 도시답게 편의점에 와인은 없고 맥주만 있었다. 많이 마실 기력도 없고 해서 맥주 6캔, 1팩만 가져왔다. 내가 계산을 하려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ID를 요구했다. 이젠 익숙한 일이라 난 기계적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알바생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얘기했다.


“All of you (니네 전부)”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고 웃음도 나지 않는다. 석헌과 현암도 체념한 듯 주섬주섬 ID와 여권을 내밀었다. 힐끗 확인한 알바생은 그제야 결제하고 맥주를 내주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맥주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스트라이크를 다섯 개 연속 맞은 우리에겐 더 이상 반응할 기력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영혼이 탈탈 털린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씩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이 지나고 보면 나중에 더 큰 추억이 될 것이라 스스로에게 위안했다. 그런데 그 위안은 단순한 정신승리가 아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그 어느 소재보다 생생하게 여행 4일 차의 하루를 추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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