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3일 차 Barstow
로드트립 1일 운전, 406마일(650km), 6시간 8분
나는 운전을 싫어한다. 보통 남자들이 차에 관심이 많고 운전도 좋아하는 편인 반면 난 처음 운전면허를 땄을 때부터 운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30년 전인 1993년 말, 미국 어학연수를 끝마치고 일본친구들과 한 달간 미국 로드트립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운전을 처음 해 봤는데, 아, 미국에서의 운전은 한국에서의 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뻥 뚫린 도로에 주위엔 차가 하나도 없고 엄청난 대자연을 느끼며 운전했던 경험은 <드라이브>가 어떤 즐거움인지를 처음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난 운전을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교통체증에 늘 막혀 있는 한국의 교통상황에서 운전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이번 석헌의 로드트립을 흔쾌히 수락한 것도 30년 전의 즐거웠던 미국에서의 드라이브 경험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2주간 우리의 발이 되어 줄 렌터카를 찾기 위해 샌프란 공항으로 향했다.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에서 온 우리는 느릿느릿 나무늘보처럼 일하는 렌터카 직원들의 일 처리에 속에선 천불이 났다. 대기 줄 마저 길어 한 시간 반이 지나 드디어 차량을 접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우리의 적토마는 도요타 SUV인 검은색 RAV4.
앞으로 잘 부탁한다, 도요타 군.
운전은 나와 석헌이 번갈아 가며 하기로 했다. 원래 현암도 운전을 하려고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 오긴 했다. 하지만 10여 년 이상 속세를 떠나 있어 대중교통조차 잘 이용하지 않은 그에게 미국에서의 운전은 좀 불편한 일이기도 했고 추가 한 명 드라이버 지정비용과 그에 따른 보험료 증가 등 가격효용 측면에서도 둘이 운전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되었다.
드디어 미국 하이웨이로 진출했다. 샌프란 인근이라 그런지 서너 시간을 달리는 동안에도 차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30년 전엔 보기 힘들었던 온라인 쇼핑의 물류차량이 엄청나게 많았다. 트럭커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대형 트럭보다는 대형 화물 트레일러들의 숫자가 훨씬 많아졌다는 것은 미국이 제조업 국가에서 서비스업 국가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운전이 다섯 시간을 넘어가자 드디어 대자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 이게 바로 아메리카지! 로드트립이 일반 여행과 다른 점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그 여행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운전 자체를 즐겨야 하고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도 즐겁게 보내야 한다.
차 안에서 즐거움은 딱 두 가지밖에 없다. 동승자들과의 대화와 차 안에서의 음악감상. 그 두 가지가 어느 정도 담보되지 않는다면 로드트립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감히 드릴 수 있다. 하루 최소 6시간 이상을 차에서 보내는데 이 두 가지 중 적어도 하나라도 되어야지 하나도 갖추지 못한다면 로드트립의 의미가 없는 것은 물론 그 여행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운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가벼운 근황토크부터 얘기를 시작했다. 이미 지난 이틀간 꽤 많은 대화를 나눴던 터라 주요 소재는 다 고갈된 상태였다. 그래서 처음 나온 주제는 내 딸과 현암의 아들 등 자식 이야기였다. 이래저래 토크를 주고받는데 뭔가 평소와 다르게 깔끔한 진행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 이유를 곧 알아챘다. 그동안 우리의 대화는 거의 알코올과 함께였다. 초기 소맥 몇 잔 와인 몇 잔의 마중물만 있어주면 그 이후는 자동으로 술의 힘으로 대화가 견인되어 가는 것이 한결같은 우리의 만남이었다. 그런데 차 안에서 맹숭맹숭한 정신으로 그것도 자식 이야기를 심지어 무자식인 석헌과 함께 이야기를 진행하니 도저히 매끄러운 진행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판단착오를 재빨리 인정하고 화제를 전환했다. 임성한 작가처럼 초기부터 몰입감 있게 끌고 가는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주책맞지만 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시계추를 36년 전으로 돌려 대학 1학년 카니발 때 처음으로 데려온 여성 파트너가 누구였는지를 회상해 보기로 했다. 2학년 때는 우리가 회장단이었고 각자 친한 상태였기 때문에 각자의 파트너를 다 기억했지만 1학년때는 그러고 보니 서로의 파트너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35년 전 우리의 파트너들이 2024년 미국땅에서 애꿎게 소환되어 나왔고 그렇게 로드트립에서의 우리 대화는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6시간의 운전을 마치고 Dr. 구가 예약해 준 California Inn에 도착했다.
우리가 Dr. 구에게 요청한 숙소에 대한 조건은 좀 까다로운 것이었다. 운전시간을 고려한 적정한 위치는 기본이고 방 하나에 Extra bed 포함한 3 베드에다 가격은 150불 안팎, 많아도 200불은 넘지 않는 조건이었다. 거기에 조식은 반드시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포함될 것까지. 챗GPT에 요청해도 인공지능이 못해먹겠다고 때려치울 조건을 Dr. 구는 묵묵히 소화해 냈다.
체크인 후 만족스러운 호텔조건을 확인한 우리는 드디어 하루일정의 메인인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다. Dr. 구가 추천해 준 멕시칸 식당으로 향한 우리는 멕시칸 음식러버인 석헌의 주문대로 이것저것 시켜 맥주와 함께 먹고 마셨다. “보람찬, 하루일을, 끝마치고서!” 이 팔도사나이 노래가 절로 나오는 저녁식사였다.
그동안 머릿속에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미국 로드트립의 진정한 첫 하루. 오랜 운전을 마치고 미국 어느 소도시 모텔에 체크인 후 맘 편히 먹는 첫 저녁식사. 출발 전에는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오늘처럼 이렇게 12일을 더 보내면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도 함께 찾아왔다.
맥주를 더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의 운전보다 내일의 운전이 좀 더 걱정됐다. 3명이 호텔방에서 같이 자고 난 후 출발하는 운전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 방에서의 맥주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맥주 한 병씩만 더 마시고 로드트립의 첫 날은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