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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엉 Mar 13. 2024

1일 1버리기 1일차

와인 소믈리에르가 되고 싶었던 소녀

우리 엄마는 술을 드시지 않는다. 누군가 '이 좋은 걸' 왜 안마시냐고 물어보면 "어제 끊었어~"라고 말씀하시는 걸 30여년 동안 50번 넘게 본 것 같다. 근데 잠깐,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달랐다. 어디선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와인 한 잔이 좋다.'는 걸 들으셨는지, 엄마는 밤마다 와인을 조금씩 마시고 주무셨다. 그시간즈음 난 항상 식탁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와인병을 열 때마다 흐르는 향기가 코에 달큰하게 닿았다.






중학생 때부터 심리학과를 목표로 공부하던 내가 고등학생 때 와인소믈리에르가 되고 싶다며 S여대 르꼬르동블루 학과를 가겠다고 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당시 트위터에 와인, 와인바 등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강남의 한 와인바 사장님께 멘션을 보냈다. 고등학생이라 와인은 못 마시지만, 와인 소믈리에르가 되어 와인바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견학을 좀 시켜달라고.


터무니없는 패기였지만 그는 흔쾌히 나와 친구를 초대했다. 우리는 비싼 저녁을 대접받고, 와인저장고를 모두 구경하고, 값비싼 워터(왠지 이렇게 써야할 것만 같다)와 와인바의 역사가 담긴 기념북, 박세리선수의 사인모자(?)까지 받아왔다. 왕복 3시간의 여정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 학년부장선생님 할 거 없이 모두 노발대발하셨다. 멀쩡히 공부 잘 하던 애가 무~슨 와인이냐고. 말~이 와인이고 소믈리에지 술장사라고. 너 술장사하라고 지금까지 우리학교가 너 밀어준 줄 아냐고 블라블라..


태생이 어른 말씀을 잘 듣는 타입이어서(?).. 혼쭐이 난 뒤에 와인은 성인이 된 후에 배우기로 하고 심리학과에 갔다. 하지만 심리학을 배우면서도 와인에 대한 미련은 놓지 못했다. 친구가 다니는 K대학교에서 대학생 대상 와인소믈리에 프로그램이 열려 그걸 함께 수강했다.


겨울방학이었던가. 고등학교 친구 셋이서 짧은 패딩을 입고 다니며 재밌게도 배웠다. 프랑스에서 초빙된 전문가들이 왔을 땐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배운 불어를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고, 그때 그 전문가가 말한 Fig를 아무도 못 알아듣자 “무화과입니다.”라고 알려준 어떤 오빠에게 반하기도 했었다.


이론과 실기를 몇 주 배우고, 시험을 치면 와인소믈리에 자격증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시험비가 아까웠던 우리는 돌연 ‘돈 내고 자격증 따는거네!’하며 시험을 보지 않았다(시간이 흐른 뒤 두고두고 후회했다).


자격증은 없었지만 이걸 계기로 WEST 와인 학원(고등학생 때 간 그 와인바의 같은 건물에 있었다)에서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좋은 강사님들을 만나고, 어깨너머로 배우고, 수업 후 남은 와인들을 시음하기도 했다. 인생 최고의 불장난같은 사랑도 이 학원에서 했다(..).


이태원의 한 뉴질랜드 와인바에서도 일했다. 교환학생도 와이너리 투어를 하고 싶어서 불어권으로 신청했다(불문학과 애들한테 점수가 딸려서 벨기에로 다녀오느라 못하긴 했다). 근데 와인을 알면 알수록,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졌다. 이 비싼 와인들은, 내가 일할 때만 접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할 때쯤, ”나는 와인 마시면 여드름이 올라와, 안 맞는 것 같아.“ 하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대학생 내내 이 작은 책을 얼마나 아꼈는지.


맥주러버로 정체성을 바꾼지 족히 10년은 되었지만, 와인 소믈리에르를 꿈꾸며 일만 하던 어린 날의 나를 생각하면 짠하다.


석사 졸업 후엔 박사를 가서 교수까지 되고 싶지만 그길을 걸어가기엔 학비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지도교수가 별로였어서 박사 갈 마음이 안 들어.” 하고 다니던 몇개월 전의 내가 생각나서 더 짠하다.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접고 있구나.






얘야. 너는 무슨 종류의 술을 마시든 많이 마시면 여드름이 난단다. 그러니 곧 부자가 되어 무궁한 와인을 마셔보자꾸나.


미련을 추하다 여기지 말 것. 추억은 지니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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