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린 Mar 17. 2024

나의 독립 투쟁기

나는 선택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이곳에서 삶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며칠, 몇 달 동안 엄마에게 컴퓨터 한 대만 사달라고 애걸복걸 매달렸다. 결국 엄마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중고 노트북을 사주셨다. 

노트북이 생기고 나서 인터넷을 접했다. 인터넷 세상을 접하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은 집으로부터 독립이었다. 

인터넷 안에는 여러 정보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정보들을 습득하며 내 삶에 대해 그려나갔다. 우선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독립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선 직업을 가져야 했다. 직업을 가지려면 해당 지식과 자격이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학벌주의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중학교를 자퇴한 중증장애인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일단 학위 취득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를 할 자신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공부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여러 봉사 단체에 글을 올렸더니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들 덕분에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뒤에 중등검정고시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학생이었던 그분들은 시간이 지나자 각자 취업을 하게 되면서 더는 공부를 도와줄 수 없게 되었다. 그중에 공부를 도와줬던 한 언니는 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게 다른 대안들을 알아봐 주었다. 언니는 검정고시장에서 항상 시끄럽게 응원을 하던 사람들과 낡아빠진 봉고차 앞에 새겨진 장애인 야학이 떠올랐고, 내가 거길 다녔으면 한다고 했다. 집에서 겨우 1년의 한 두 번 외출하는 내가, 계단만 있는 3층 집에서 매일 야학에 다닐 수는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다니는 것조차 달갑지 않아 하던 가족이 야학에 다니는 걸 허락이나 해 줄까? 이런저런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저지르지 않으면 아무 일이 안 일어나는 법처럼 오랜 고민 끝에 가족과 싸워서 야학에 다니기로 결심했다. 


야학은 주 3회 나가야 했다. 계단만 3층인 우리 집에서 내가 나간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을 방불케 하는 엄청 난 일이었다. 가족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야학에선 3층 집 계단을 엎고 내려갈 줄 사람을 매일 모집하고 이동시켜 줄 차량을 가진 사람들을 섭외했다. 사람을 섭외하지 못한 날에는 서로 미안해하며 야학 홈페이지에 괜찮다는 근황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야학에 다니면서 다른 장애인단체도 알게 되었다. 단체 활동도 하면서 사회에서 지워진 나의 위치, 다시 말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리를 되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 전동휠체어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전동휠체어는 나에게 날개 같은 것이었지만, 편의시설이 갖춘 건물이 아닌 사회 밖으로 나오면 무거운 고철 쇠덩어리로 전락된다는 사실을 뼈 저리게 느껴야 했다. 지역사회는 온통 계단과 턱으로만 만들어진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는 고철 쇠덩어리이지만, 내게는 날개인 전동휠체어가 생긴 뒤로 언니들을 졸라서 계단을 엎고 내려다 주면 혼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고지대 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지하철은 극히 일부였기에 집에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1시간 30분을 전동휠체어로 달려가야만 탈 수 있었다. 지금도 인도길은 불편한 곳이 많지만, 그때는 접근조차 쉽지 않은 인도가 많아서 오르지 찻길로만 다녀야 했다. 나보다 몇 배 큰 버스가 옆으로 지나칠 때면 공포 영화의 무서움을 몇만 배 더 느껴야 했으며, 뒤에서 차가 경적 소리라도 내면 심장이 쿵 내려앉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위험한 이동이었음에도 아무 도움 없이 내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갈 수 있다는 것 자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무 희망도, 기대도 없었던 내 삶이 팔딱팔딱 뛰는 듯해서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건 이동이라도, 길에서 차에 치어 죽더라도, 집 안에서 갇혀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이동만 4시간이 걸려도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녔다. 그런 끈기 때문인지 장애인 단체에서 상근 제안까지 받게 되었다. 아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내가, 일을 할 수 있다니!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좋았다. 

주 3일 반상근을 시작으로 왕복 5시간을 걸리는 그곳에 출근을 했었다. 1년 가까이 위험한 이동을 계속하며 나는 다시 가족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독립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활동지원 서비스(신체적 혹은 정신적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에게 인력이 파견되어 일상생활을 지원해 주는 국가 제도)도 제대로 갖춰 있지 상황이었는데 혼자서는 화장실도 못 가는 내가 독립을 하겠다고 말하니 가족들도 기가 차서 대꾸도 안 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무언가 마음먹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을 가지지 않았는가? 어릴 적부터 내 인생의 사명감처럼 생각해 온 독립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고 말 것이다!라는 다짐으로 2년 동안 꾸준히 가족을 설득하고 싸우면서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혼자서는 설득이 안 될 것 같아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까지 동원시켰다. 그것도 안 먹혀서 엄마와 같이 산 넘고 물 건너 이용하는 내 이동 코스를 함께 동행도 했었다. 그 험난한 이동 길을 함께 하루 경험한 엄마는 나에게 결국 두 손, 발 다 들고 독립을 허락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독립하여 20년 동안 혼자 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장애를 가진 어린 시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