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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2번째 카드 열한 번째!

러브 픽션

by 달빛바람

개요 멜로/로맨스 대한민국 121분

개봉 2012년 02월 29일

연출 전계수


데뷔작이 결코 행운과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당신의 2번째 카드에 대한 이야기!



1. 오프닝: 창작과 자기혐오

이 영화의 문은 오래된 장르의 외투를 걸친 채 열린다. 어느 도시의 낡은 골목, 먼지 쌓인 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드는 석양빛, 그리고 어딘가 피로가 배어 있는 탐정의 뒷모습. 팜므파탈이 등장하고 그녀는 탐정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달라'라고 의뢰한다. 누아르의 그림자를 빌린 이 첫 장면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컷 같다. 그러나 그 모든 허구는 카메라를 향한 “그다음엔 뭐라고 해야 하죠?”라는 여자의 대사 한마디로 무너진다. 인물이 제4의 벽을 깨는 순간, 이야기는 관객을 향해 입을 벌리고 스스로를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 돌연한 ‘4의 벽’의 붕괴는 관객을 익숙한 장르의 안전지대에서 거칠게 밀어낸다. 감독은 처음부터 이 영화가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재현 그 자체’—즉,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 허상 뒤에 드러나는 것은 좁고 어수선한 방 한구석, 창작의 막다른 길에서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는 소설가 구주월(하정우)의 초라한 실체이다. 방금 전까지의 장면은 그의 상상력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공허한 조각일 뿐이었다.

"그해 봄...... 나는 가히 내 삶의 최고조 위기 상태에 빠져있었다."

라는 내레이션이 흐르는 순간, 우리는 그가 단지 글이 막힌 작가가 아니라 삶 전체가 멈춰버린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소설도 막히고, 연애도 막혀버린 말 그대로 ‘삶이 멈춘 남자’의 초상이다.

전계수 감독은 이 오프닝을 통해 영화의 두 줄기를 명확히 드러낸다. 하나는 창작의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서사이다. 구주월에게 글을 쓴다는 일은 곧 남성성의 증명이며 상상력이 막힌다는 건 존재 자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그는 가장 손쉬운 구원의 서사를 부른다. 바로 ‘뮤즈’라는 이름의 환상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다. 다만 메말라버린 창작을 다시 굴러가게 할 ‘재료’가 필요할 뿐이다. 그는 아직 타인을 사랑의 주체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군가를 자신의 서사에 장식처럼 덧입히고, 이야기의 연료로 태워버릴 준비만 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 영화의 오프닝은 단순한 연애 영화의 도입부가 아니다. 낭만이라는 신화를 가장한 한 예술가 지망생의 자기기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재료 수집의 시작이다. 감독은 이 장면을 과장스러우면서도 위트 있게 펼쳐 보인다. 마치 오래된 타자기의 철심 같은 소리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긁어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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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바람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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