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단팥 인생 이야기>
가을이 깊어질수록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아침마다 창문을 연 순간 들어오는 냉기가 손등을 스칠 때, 나는 어김없이 서랍 속의 오래된 편지들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계절마다 장을 보듯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만, 나는 유독 가을이 되면 종이와 봉투에 손이 간다. 종이를 만질 때 느껴지는 매끈매끈한 촉감, 연필을 깎는 사각거리는 소리, 손가락에 전해지는 긴장 같은 감각들은 디지털 화면이 대체하지 못하는 세계다. 이 계절만 되면 나는 편지가 품은 느린 시간의 리듬을 다시 찾아가고 싶어진다.
서랍을 열면 여러 크기의 봉투가 층층이 쌓여 있다. 군 복무 시절 어머니가 보낸 편지,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어설프게 꾸며주었던 생일카드, 고사리손과 서툰 철자들이 뒤섞인 위문편지, 그리고 오래전 연인이 건넸던 짧은 안부의 글들. 종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렇게 변하고 구석이 닳지만 편지 안에 들어 있던 마음만큼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어떤 글들은 삐뚤어져 있고, 어떤 문장에는 서툰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마음의 모양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문자 그대로 ‘누구에게 보내는 마음’이 종이의 앞면과 뒷면에 고스란히 박혀 있다.
요즘 우리는 대부분의 감정을 매끄러운 액정 위에서 주고받는다. 화면 속 글씨는 균질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오타는 손가락 한 번으로 지워진다. 수정이 쉬운 만큼 마음도 가볍게 붕 뜬다. 표정 대신 이모티콘이, 떨리는 목소리 대신 짧은 문장이 대신한다. 편리하고 효율적이지만, 그 안에는 ‘눌러쓴 시간’이 없다. 잘못 썼음을 깨닫고 종이를 새로 꺼내는 한숨도, 한 글자 적기 위해 숨을 고르는 고요도 없다. 그래서인지 그 글자들은 쉽게 사라지고, 쉽게 교체되고, 쉽게 잊힌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그런 편리함에 익숙해져 누군가의 안부에 손 편지가 아닌 짧은 메시지로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을이면, 종이의 질감이 공기 속에서 더 뚜렷해지는 이 계절만큼은 달랐다. 몇 해전가을, 오랜만에 편지를 써보겠다고 연필을 깎았던 날이 있었다. 칼날이 나무를 벗기는 소리를 들으며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편지는 이상하게도 ‘첫 문장’을 쓸 때 마음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가장 솔직해지거나, 가장 숨기고 싶은 마음을 애써 포장하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그날 어떤 쪽을 택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 편지를 정말 보내야 하는지 아니면 나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인지 생각했다. 결국 봉투를 붙이지 못한 채 편지를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보내지 않은 편지였지만 그 글을 적는 과정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내 마음의 뒷면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무렵 다시 떠올린 영화가 있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이 영화는 편지가 등장하는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편지의 ‘본질’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도쿠에 할머니는 평생 사회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았다. 손에 마비가 남아 작은 동작도 조심스러웠고, 자신을 둘러싼 편견 때문에 오랜 세월 외롭게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마지막 편지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삶에 지쳐 있던 센타로에게 도착한 그녀의 편지는 함께 보낸 한 계절의 추억과 더불어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깊은 용기를 건넨다. 그 글 속에는 할머니가 생을 살아내며 마주한 바람, 비, 그리고 팥이 익어가던 밭의 계절과 같은 모든 경험이 잉크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짧게 지나가지만, 단 한 통의 편지는 인물의 삶을 뒤바꿀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다. 편지가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 그 자체의 증거'임을 영화는 묵묵히 증명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글자를 새기며 들였을 정성, 꾹 눌러쓴 문장의 흔적, 글씨 사이사이에 묻어 있는 고뇌와 선택의 무게가 센타로의 마음을 깊숙이 뒤흔든다. 결국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완벽한 사람보다 불완전하지만 흔적이 담긴 존재가 더 오래도록 기억되며, 그 흔적은 편지라는 형태로 남을 때 가장 선명한 가치를 발한다고 말이다.
영화의 여운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서랍을 열어 어머니의 편지를 꺼낸다. 이등병 시절, 힘든 날에 받은 한 통의 편지였다. 앞면에는 단정한 글씨가 가지런히 적혀 있지만 내가 오래 들여다보는 건 뒷면이다. 펜을 꾹 눌러쓴 자국들이 종이를 밀고 올라왔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맞춤법이 틀릴까 봐 다른 종이에 연습을 한 뒤 옮겨 적었고, 대학 나온 이웃에게 글이 자연스러운지 확인까지 받았다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도착한 편지는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어머니가 그날의 시간을 온전히 내게 내어준 결과물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로, 나는 종종 그 뒷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종이를 눌러 올라온 힘의 흔적이 내 손끝에 닿을 때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전해진다. 그 무게는 누군가의 하루를 내 삶 속으로 가져오는 힘이다. 편지는 복제되지 않는다. 같은 문장이라도 각기 다른 힘으로 눌러 적히고, 각기 다른 호흡으로 적힌다. 그래서 편지는 한 사람의 마음이 시간과 손끝을 거쳐 세상에 나온 ‘구체적 형태’이다. 우리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졌고, 그 덕에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편지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 우리를 다시 천천히 앉히고, 손끝을 천천히 움직이게 만든다. 빠르게 적고 빠르게 잊히는 문장은 많아도, 천천히 적고 오래 남는 문장은 드물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11월, 나는 또 한 번 연필을 깎아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퍼진다. 종이 위에 한 문장을 써 내려가다 멈춘다. 이 편지를 보낼지 아니면 또다시 서랍 속에 넣어둘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편지는 수신자에게 닿는 과정보다 ‘쓰는 과정’에서 더 많은 진심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게 하고, 미루어둔 감정을 불러내어 다시 정리하게 한다. 편지는 결국 타인을 위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마주하게 만드는 일이다.
어머니의 편지 뒷면을 쓸어보며 내가 울컥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 뒷면에는 글자보다 더 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가 망설였을 순간들, 고쳐 썼던 횟수, 틀릴까 걱정하며 연습했던 마음, 조심스레 봉투를 닫으며 나를 떠올렸을 표정까지. 그 모든 선택의 흔적이 종이 위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흔적을 읽으며 깨닫는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국 시간과 수고를 함께 건네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해 준 계절은 늘 그렇듯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