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글놀이 2월 2주 '나를 칭찬합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실 무의식은 다 알고 있다. 우리가 정리해야 할 물건을 아무렇게나 서랍 속에 넣고 문을 꽉 닫아두었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뇌도 알고 있다.
해결되지 않은 의사결정 때문에 피로가 쌓이고 의식이 흐릿하고 집중이 안 되는 상황을 브레인 포그(brain fog)라고 한다.
안개를 걷으려면 그저 미루거나 가리지만 말고 일어나 정리를 하라는 소리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 정리가 하기 싫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그렇다. 막상 치워 놓으면 너무 좋다. 미뤄둔 일을 완료한 후에 찾아오는 여유와 개운함을 정말 좋아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다 알지만 지금 당장 내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어쩌나 하고 찬장문을 살포시 닫는다. 지나갈 때마다 째려보며 지금은 말고, 음 조금만 있다가... 하고 자주 미루었다.
승무원들은 승객탑승전 프리플라이트 (pre-flight) 체크를 한다. 여러 가지 체크 중에 식음료탑재 상황은 장거리 비행 시 안전 업무에 이어 신속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식사가 모자라면 하늘 위에 다른 가게에 잠깐 들러서? 드시고 올 수는 없는 일이기에 탑승객 수만큼 식사와 간식 등의 수량이 맞는지, 그 카트의 위치가 어디에 탑재되었는지도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해당 승무원의 뇌는 누구보다 바쁘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메모하고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짧은 시간에 외워 둔다. 그리고 이륙한 후 카트 속 아름답고 깨끗하게 줄 맞춰 탑재된 수백 개의 트레이들은 완전히 지저분한 상태로 카트로 다시 들어간다. 그 쓰레기들과 함께 기억해 둔 정보도 그 순간 지워진다. 서비스가 잘 끝났기 때문이다.
식사 서비스 후 회수된 트레이는 손님들이 쓰신 대로 엉망진창이어도 괜찮다. 어차피 카트의 문을 쾅 닫으면 모든 기내식 트레이와 스푼, 휴지나 각종 음식물 쓰레기는 카트 속에 다시 보관된 상태로 현지에 도착하면 케이터링에서 잘 처리해주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만 잘 닫고 잘 잠그고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출발 전 깨끗하게 소독된 카트는 서비스 후에는 마치 쓰레기통처럼 되지만 이륙 전과 도착 후, 비행기는 신기하게도 겉으로 보기에 똑같다. 그 속은 아무리 엉망인 상태이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나는 더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리할때 그저 문만 닫는다.
승무원을 오래 하다 직업병이 생겼던 것일까? 나는 문을 닫으면 깔끔해 보이는 정도의 청소에는 자신이 있었다. 안 보이는 곳은 누구도 못 보기에 괜찮지 않냐며 대청소를 미루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집은 카트 문만 닫으면 되는 비행기와 다르다. 옷장의 문을 잠시 닫아두면 어쩌다 손님이 오실 때는 깔끔해 보여서 대체로 문제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내부의 카오스 상태를 나는 알고 있다.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눈에서 멀어져도 내 마음속의 짐은 어딜 가도 안개가 끼어 따라다니는 것이다. 닫힌 옷장 속 헝클어진 내 상태.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로 돌아볼 때마다 나를 놀라게 했고 열 때마다 대책 없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제발 나 좀 나가게 해달라고 무섭게 말이다.
그래서 결심하고 버리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동네책방 <너의 작업실>에서 하는 '야금야금 미니멀 라이프'에 참여했다. 나는 신나게 버릴 각오를 하고 그릇장 문을 열었다. 그런데 멈칫하고는 우선순위를 슬쩍 바꾸곤 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고 왠지 그게 너무 바쁜 일인 것 같아서 슬그머니 그 문을 닫고 말았다.
작은 것 한두 개정도 버렸지만 본격적으로는 시작하지 못하다 갑자기 정리를 하게 된 날은 내가 가장 시간이 없을 때였다. 얼마 전 급히 부산에 다녀와야 할 일정이 있어 처음으로 1박 2일간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가야 했다. 갑자기 잡힌 일정에 몸과 마음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폭풍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감효과(deadline effect)처럼 숙제나 마감직전에 글을 쓰면 미친 집중력상태가 되어 안 나오던 글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았다.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느라 오래 걸렸던 정리의 속도가 엄청난 스피드로 착착 분류되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많은 그릇류와 오래된 잡동사니가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다. 나갈 시간이 다 되었고 나는 비워진 그릇장의 문을 가볍게 닫으며 '엄마 다녀올게' 하며 훨씬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정리는 단지 개인의 성장과 삶의 만족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정리를 통해서 나에게 쓰임이 없는 것을 오래 묵혀두기보다 타인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에 절로 힘이 나곤 한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밖에서 일하고 지쳐있더라도 집에 돌아오면 청소와 밥을 차려내었던 어릴 적 나의 엄마 같은 워킹맘들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환경에서도 주변에 더 많은 도움을 주려 봉사에 나서는 분들을 보면 어디서 저렇게 많은 힘이 날까 놀라기도 한다. 대단한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나는 타인을 위하는 일에 내가 몰랐던 힘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회사생활 하는 동안 줄곳 느껴왔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하는 일은 나에게도 에너지를 주는 일이기도 하다. 쓸모없이 쌓여 무의식적으로 에너지가 뺏기기만 했던 잡동사니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겨울옷으로 입혀지고 신겨지고 사용되는 것은 내 에너지가 더 충전되는 일이 된다.
좋아하는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핑계로 내일로 모레로 자꾸만 정리를 미루던 나는 버리기 챌린지 단톡방에서 튀르키예로 구호 물품 기부를 하신다는 한 멤버의 메시지를 보았다. 순간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가 바뀌며 지금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은 역시 '버리기와 정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내 안으로 강하게 들어왔다. 생각만해도 힘이 충전되었다.
내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미룰 기회를 주면서 삶의 후회를 만들 기회도 함께 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 무의식에게 솔직하게 대하기로 했다. 자책보다 칭찬으로 내 에너지를 더 키워내는 선택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나를 칭찬해 본다.
정리하기로 시작한 일.
지금 하자 일어나 행동한 일.
혼자보다 함께한 일
나의 부족한 면을 글로 쓰며 부끄러워하기보다 나아지려는 나를 칭찬해 본다.
*튀르키예로 구호 물품을 보내는 것으로 힘을 내서 정리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도 하고 정리도 같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추가 수정합니다- 중고 물품은 기부가 안된다고 합니다 ! )
필요 물품 목록>
겨울 의류 (성인 및 어린이) 코트, 재킷
우비 부츠 점퍼 바지 장갑
스카프 모자 양말 속옷
텐트 침대 매트리스(텐트용)
담요 침낭
촉매 가스스토브, 히터
가스 튜브
보온병 손전등 파워뱅크
제너레이터
식품 상자(내성 식품 -통조림:이슬람 국가라 돼지고기 첨가된 것 제외)
어린이 음식 기저귀
청소 및 위생물질 생리대
(보내실 때 비닐로 한번 감싸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매거진의 이전 글, 실배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