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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10. 2023

세상 가장 강력한 '미안하단' 말

"여보, 옷을 이렇게 놓으면 어떻게?"

"아.... 미안해요."


"여기 보세요. 예산서 내역을 빠트린 부분이 보이네요."

"앗? 그래요? 죄송합니다."


"아빠, 좀 조용히 해. 공공장소잖아."

"오. 조심할게 미안."


"야 인마. 너는 사는지 죽은 지 연락도 없냐?"

"미안해. 내가 좀 정신없었네. 잘 지내지?"


"공을 이쪽으로 치면 어떡해요. 저 쪽으로 보내야지"

"쏘리쏘리. 이번엔 잘 칠게."


이번 주 보글보글 매거진 글주제 '나를 칭찬하기'를 받는 순간 '미안해요.'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나를 칭찬하라고 했더니 미안하다라니 참.


살아오면서 한번 맺은 인연과는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이어왔다. 그 이유를 돌아보면 잘못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을 땐 무얼 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는 분명 의견 차이가 발생하고 때론 균열이 너무 커져 더는 좁힐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그럴 땐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가 중요했다.  


특히 결혼하고 나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보기만 해도 설레고 어떤 행동을 해도 예쁘게만 보이던 시기가 지나 양말 벗는 것, 물건 두는 것, 치약 짜는 것까지 일상의 소소한 습관이 칼로 쇠를 긋듯 거슬렸다. 사소한 일로 으르렁대고 한번 부딪치고 나면 긴 침묵의 시간에 돌입했다. 그 기간은 며칠 혹은 몇 주까지 되었다. 이제는 무엇 때문에 부딪쳤는지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초반엔 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묵은 감정은 사라졌음에도 쳐다보면 슬쩍 웃음까지 나오면서도 '미안해'란 세 단어가 그리 어려웠다. 그래도 결국 그 단어를 먼저 꺼내는 사람은 나였다.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받았고,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며 살가운 예전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어때.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번 미안하다는 말이 어렵지, 그 뒤로는 술술 나왔다. 언젠간  아내는 찌르면 미안하단 말이 나온다고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아무렴 어때.


미안하단 말은 확장되어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소한 잘못에도 시원하게 인정하며 그 말을 꺼냈다. '사랑한다.', '고맙다', '최고다', '멋지다'란 세상의 말말말 중에 '미안하다'는 말이 그리 강력한 줄 몰랐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강력한 얼음은 산산조각 나 버리니.


며칠 전이었다. 아내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내는 요즘 푹 빠져있는 가수의 동영상을 보고 있었고,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평소와 다른 사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긴 세월 함께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이었다.


슬쩍 말을 건네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확실하군. 일단 무언지 모르지만 미안할 태세를 완벽히 갖춘 채 물었다.


"여보? 혹시 무슨 일 있어?"


막 힌 둑이 무너지며 거대한 물결의 쏟아졌다. 아내가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상의했건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양말은 세탁기 옆에 벗어놓으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화장실 앞에 그대로 두었다. 특히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에 관해서 비하하는 말까지 했단다.


순간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아리송했다. 일단 이럴 땐,


"아.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정신을 못 차리네. 앞으로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기 말 잘 듣고, 양말도 꼭 세탁기 옆에 벗어 놓을게. 사실 나도 그 가수 좋아해. 질투가 났었나봐.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정말."


아내 얼굴에 미세한 변화를 느꼈다. 슬 봄의 햇살이 느껴졌다. 됐다. 슬쩍 옆에 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더니 탁하고 밀어내지만 강도가 약했다. 나중에 카톡으로 커피 쿠폰도 보내며 슬쩍 주말 데이트를 청했더니 알았다는 이모티콘이 왔다. 근사한 곳에서 둘이서만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장기간 지속될 뻔한 냉각기도 해결하고, 덤으로 저녁까지 하게 되었으니 스스로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해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까짓것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앞으로도 나는 '미안하다'라는 강력한 무기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 보리라.  

 


보글보글 매거진 2월 1주차 글감 '나를 칭찬합니다!'입니다.


이전 Jane jeong 작가님의 글입니다.



https://brunch.co.kr/@janejeong/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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