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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Mar 15. 2024

넌 완벽하지 않아. 나도 그렇고

-우울한 밤 영화 한 편. 그리고 기도

 직업 특성상 종일 E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나는 사실 극 I타입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있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I. 게다 거의 한평생 우울한 성향. 

써야만 한다. 굉장히 우울해 뭔가를 끄적거리지 않으면 침잠하는 마음에 질식할 것 같은 날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인생이 날리는 강펀치를 한 번도 맞아본 적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밝은 얼굴에 이유도 없이 유난히 심사가 뒤틀리는 날.


 따지고 보면 별 일도 아닌 작은 것들이 우울함을 부추긴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가난해질 일만 남은 내 앞날을 예견하는 것들. 같이 사는 사람들 특성상 평생 입 안 가득 고구마를 꾸역꾸역 씹어 넘기는 갑갑함과 원망, 연민 사이에서 늙어죽겠구나 싶은 낙담 같은 것들. 


 이렇게 우울한 날엔 늘 하던 일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아 하루가 유난히 길다. 우울함을 느끼는 일에도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뭘 할 의욕도 생기지 않아 잠이나 자려고 누웠는데 카톡. 동료들이 회식자리에서 찍은 사진을 연이어 전송했다. 손가락 하트를 날린 사진 속 밝은 표정의 동료들이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영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이렇게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인 생각에 감정이 자꾸 소진되는 날엔 마음에도 수혈이 필요하다. 내겐 영화나 책이 그런 역을 주로 맡기에 결국 언젠가 지인이 추천한 메리와 맥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메리와 맥스.

 아동방임, 중독, 장애, 우울증 등 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클레이 애니메이션 영화. 외로운 여덟 살 아이 메리와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스펙트럼 중 하나)을 앓고 있으며 마흔넷 비만의 중년 남자인 맥스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는 이야기. 영화를 보며 소위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둘의 소외된 삶과 외로움, 때론 구질구질함이 내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아 감정이 더 나락으로 떨어지던 찰나, 맥스가 메리에게 보낸 편지에 가라앉던 마음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용서하는 이유는 넌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야. 

넌 완벽하지 않아 나도 그렇고.

내 장래희망은 내가 아닌 사람이었어...


 그 단점들은 우리가 고른 게 아냐. 우리의 일부야. 함께 살아가야만 하지.

의사는 말하길 모든 이의 삶은 긴 도로라서

잘 포장된 곳도 있고 내 경우처럼 깨진 곳도 있고 바나나껍질이나 꽁초가 있는 경우도 있대.

네 것도 나와 마찬가지야.

하지만 흠이 많진 않을 거야.

 언젠가 우리의 길이 서로 만나면 연유도 함께 맛볼 수 있겠지. 

넌 나의 소중한 친구고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

                                   너의 미국인 펜팔 맥스 제리 호로비츠가.


  단 한 사람. 요즘 자살 관련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벼랑 끝에 있을 때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살하지는 않을 거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던데, 메리에게는 그 한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I 성향 탓에 맥스 같은 친구도 만들지 못했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럴 주제도 못되지만 오늘밤엔 기도하고 싶다. 나와 같이 자꾸 마음이 가라앉는 우울한 사람을 위해. 벼랑 끝에서 갈피를 못 잡는 사람을 위해.


신이시여,  

벼랑 끝에 선 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단잠으로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깨진 도로에도 끝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존재의 변변찮음을 용서하고 제자리를 벗어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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