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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Apr 14. 2024

슬픔의 민낯, 맨체스터 바이 더 씨

- ChatGPT에게 물었다. 너무 슬플 땐 어떻게 하냐고.

지인은 그저 좋은 영화라 했다. 제목만 보며 바닷가에서 펼쳐질 잔잔한 사랑 얘기를 들을 채비를 했다. 일요일 오전 가벼운 영화 한 편 보며 기분 전환도 할 겸. 줄거리라도 미리 봤으면 절대 플레이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영화. 가볍게 보기엔 슬픔의 민낯을 너무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거대한 슬픔의 형상이 있다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나오는 ‘리’와 같지 않을까.


 가르치는 학생 어머니가 얼마 전 찾아와 현재 고1이 된 기영(가명)이가 유치원 때 남편과 사별했다고 했다. 그래서 기영이는 초등학교 때 ‘아빠도 없는 새끼, 말도 못하는 새끼, 저런 애랑 놀지 마’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듣기도 했다고. 유난히 많이 웃고 반듯한 기영에게 지금은 괜찮은 지 살짝 물었는데, 좋다고 했었다. 기영이는 모범생이다. 어려운 친구를 도울 줄 알며 수업태도가 바르다. 그런데 기영이의 표정은 밝지 않다.


 기영 어머니는 홀로 네 남매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산모 마사지를 하며 생계를 꾸려간다고. 첫째 아들은 지금 대학생인데, 중학교 때 같이 운동하던 친구에게 맞아 코뼈가 기형. 수술도 몇 차례 했지만 원상태로 회복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해학생 측에서 아무런 보상도 못 받았다 했다. 지난한 법정공방이 이어졌지만 생계 때문에 포기했고 그 일 이후 첫째가 많이 방황해서 어머니 애를 태웠다. 둘째 딸은 공황장애. 이 아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집단 따돌림을 몇 차례 겪은 아이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대안학교에 다녔지만, 지하철만 타도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결국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다.


 혼자 일하며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을 돌보느라 기영이와 기영이 동생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어머니는 기영이와 기영이 동생이 정상적인 발달을 하지 못하고 지체된 건 자신의 탓이라며 눈물을 보였다. 말속에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기구한 삶에 말문이 막혔고 솔직히 기가 찼다. 왜 생이 누구에게는 이리도 가혹한지.


 맨체스터 바닷가 마을. 리는 아내 랜디와 갓난 아들, 아직 어린 두 딸과 산다. 친구들과 집에서 밤늦도록 맥주를 마시며 게임을 하던 리는 아내가 친구들을 돌려보내자 벽난로에 불을 피운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맥주를 사러 나간 중간, 벽난로에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일 없겠거니 생각했던 리. 맥주를 사 집으로 돌아온 리는 활활 타고 있는 집과 마주한다. 거실에 쓰러졌던 아내는 구조됐지만, 사랑하던 아이 셋은 세상을 떠났다. 별 일이 다 있을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하기 싫은 설정이다. 경찰서에서 진술을 마친 후 경찰 총을 빼앗아 총구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던 리. 그는 그 일 이후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슬픔’이 되어 생을 견딘다.


 맨체스터 바닷가를 떠나 보스턴에서 잡역부를 하며 아무렇게나 살며 입에 풀칠하는 리는 막힌 변기를 뚫고 배수관을 가는 허드렛일을 한다. 미치겠는 날엔 술기운에 바에서 애먼 사람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지만, 빌라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고장 난 낡은 것들을 수리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외에 그가 하는 일은 달리 없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과 영혼 없는 눈빛의 리. 그는 다시 맨체스터 바닷가로 돌아간다.


 피붙이 형이 남긴 조카를 돌봐야 했다. 조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형의 유언 때문이다. 조카와 보스턴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조카의 삶의 터전은 맨체스터. 조카를 배려한 리는 결국 조카가 맨체스터에서 살 방안을 마련하고 자신은 다시 보스턴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조카가 물었다.

 -삼촌은 왜 가는데?

   ... ... ...

 -못 버티겠어.,, 못 버티겠어.


 시비를 걸고 흠씬 맞아도,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깨 손을 베어도 깊고 단단하게 응축된 리의 슬픔은 사라질 줄 모른다. 기영이 어머니는 기영이가 중학교 때 날카로운 것들로 팔에 상처를 내며 자해를 했다고 했다. 영화를 보며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일은, 그러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하겠다는 절규구나, 싶었다.


 -너무 슬프면 어떻게 해야 하죠?

 ChatGPT에게 물어봤다.

-당신이 슬플 땐 자신을 돌보는 게 중요해요. 당신을 즐겁게 하거나 편안하게 하던 활동들을 해 보세요. 음악을 듣거나 산책하는 일, 또는 친구와 이야기 하거나 자신을 다독이는 일처럼. 슬픔이 지속되거나 너무 압도적이면 치료받거나 상담을 하세요. 기억하세요. 당신이 필요할 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방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리와 기영에게 AI가 해 준 조언이 과연 도움이 될까. 사람이 너무 슬프면 ‘리’처럼 입을 닫고 스스로 세상과 격리된다. 그럴 땐,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무용하다 느껴진다. 기영이의 일상이 좀 수월할 수 있게끔 도울 방법을 찾아 봐야겠다. 때론 사소해도 실질적인 도움이 더 요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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