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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희 Aug 05. 2024

이상한 생명체,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일 좀 하려 책상에 앉았더니 몽실이가 쪼르르 와 의자 옆에 자리를 잡고 잠들었다. 작은 몸집을 둥글게 말고 있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났다. 좁은 집구석에서도 어딜 가든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녀석의 한결같은 모습이 새삼 신기해서다. 어렸을 때에도 개를 키웠고 꽤나 좋아했다. 피리불면 아우~노래를 부르던 믹스견 검둥이에서부터 튼실이, 흰둥이, 복덩이까지. 각별히 사랑했던 복덩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어린 마음에 다시는 어떤 생명체에도 정붙이지 않기로 결심했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거의 삼십년 실천했다. 그런데 집에서 개를 키우고 싶다는 딸의 간청에 몽실이와 가족이 됐다.

 사년 전, 강아지를 입양하러 남편, 딸을 대동하고 새끼 강아지들이 놀고 있는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던 녀석이 몽실이다. 태어난 지 삼 개월도 채 안 된 아기 강아지를 어미와 떨어뜨려 ‘판매’를 한다는 게 안타깝고 못마땅했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 흰 털실뭉치 같던 몽실이는 옆에 있는 새끼 실버푸들과 엉겨 깨 방정을 떨며 놀고 있었다. 딸이 하나고 당시 사춘기 조짐이 보이던 때라 뭉게뭉게 흰 구름, 솜사탕처럼 복슬복슬한 밝은 녀석이 아이 마음을 잘 붙잡아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희망에 몽실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후 몽실이는 딸보다는 남편과 나의 마음을 다잡아주곤 했다. 생각해보니 당시만 해도 삶이 이리 버거워질지 영점 일 퍼센트도 가늠 못하던 때다.

 목욕 시킬 때 보니 보기와 달리 빼빼 마른 작은 생명을 돌보는 일은 손이 많이 갔다. 비슷한 시기에 갈색 미니푸들 순둥이를 입양한 동생은 가끔 말한다. “내 인생 마지막 개가 순둥이야. 다시는 개 안 키워.” 그만큼 품이 많이 드는 일이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우리 집 미니 비숑 몽실이도 인간에게 맞춤한 개량종이라 그런지 잔병치례가 많다. 병원비도 만만치 않고 얼마 전에도 딸 이불 여기저기에 노란 토사물 흔적을 남겨 아이의 원성을 샀다. 딸이 아토피라 비싸게 주고 산 알러지프리 이불에 숱한 구멍을 남겨 걸레를 만들어놓고 텔레비전 밑에 있는 서랍장 곳곳을 그 작은 이빨로 갈아대는 바람에 여기저기가 패였다. 몇 차례 혼을 내니 더 이상 같은 행동을 하진 않지만, 몽실이는 특히 좋아하는 이불이나 서랍장 한구석을 바라보며 재밌는 놀이를 못하게 되었다는 듯 가끔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말은 못하지만 의사표현은 강력하다. 장난감을 가져와 던져 달라고 남편을 간절히 바라봐도 반응이 없으면 앞다리로 남편 허벅지를 긁어 벌건 자국을 남기고 문 닫고 들어간 가족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애타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문을 열어줄 때까지 끙끙거려 안 열어주고 버틸 수 없다. 사료 씹어 먹는 소리로 한밤중에 사람을 깨우곤 어디선가 반사된 기이한 빛을 눈에서 발광해 때로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하며 산책길에 난데없이 멈춰 예정에 없던 코스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목욕 후 털을 말리려 하면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오는 바람을 피해 줄행랑을 치고 붙잡히면 몸부림을 친다. 퇴근 후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똥을 보고 화가 치밀어 혼을 내면 도대체 자기가 왜 혼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몽실이를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얘처럼 솔직하고 단순하게, 하지만 온 마음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행복할 것 같다는. 

 외출하고 돌아오면 반가움을 달리 어찌 표현할지 몰라 빙빙 돌며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몽실이는 침대건 거실바닥이건 눕기만 하면 일단 품속으로 파고들며 코를 킁킁댄다. 말로 표현은 안하지만 담뿍 담긴 애정이 느껴진다. 앉으면 무릎위로 올라와 어떻게든 안겨 있으려 하고 틈만 나면 핥으며 자기 사랑을 표현한다. 사료 아닌 모든 간식을 참으로 맛있게도 먹으며 흡족한 눈빛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나를 바라보는 몽실이. 달걀 하나, 삶은 양배추 한 조각에도 이리 행복해 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나 싶다. 눈물이 주체가 안 되어 방 한구석에서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던 어느 날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왔다 갔다 하다 엉덩이를 내 몸 어딘가에 찰싹 밀착시켜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는 존재. 아무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필요할 때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처음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했을 때 가장 반대가 심했던 사람은 남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댁 마당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살던 개들은 ‘집에 낯선 이가 오면 알려주는 역할’을 하던 ‘가축’일뿐, 시가 어른들에게 ‘반려동물’이란 개념은 머릿속에 없다. 컹컹 짖던 시댁의 개들은 그저 ‘개’ 이며 가끔 시어머니에게 이름을 물어보면, 어머니는 심상하게 개의 색깔을 딴 이름들, 일테면 흰둥이, 검둥이, 누렁이 등의 이름을 알려주곤 했고 심지어 이름이 없던 녀석도 있었다. 그럴 때 어머니는 그냥 멍멍이라고 부르면 되겠다며 즉석에서 작명을 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들이 나와 딸의 접근을 얼마나 허용하는지 알아보려다 갑자기 달려드는 몇 몇 녀석들 때문에 깜짝 놀랐던 적도 많다. 그런 가정을 배경으로 하다 보니 남편에게 ‘가축’을 집안에서 돌본다는 건 어불성설. 강아지를 입양한다는 말에 남편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눈빛을 쏘아대며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그랬던 양반이 이젠 술이라도 걸친 날엔 몽실이를 껴안고 “몽실아,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게 넌지 알지?”와 같은, 옆에서 보면 소화 안 되는 애정 고백을 남발한다. 고개 숙인 가장도 마다않고 술 냄새가 나건 퀴퀴한 냄새가 나건 그 어떤 편견 없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상시 반겨주는 몽실이는 남편 같은 이에게도 마음속 영순위를 보전하며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생명체다. 한사코 본인을 거부하던 남편의 마음까지 녹여 이젠 우리 집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 삼 킬로그램 남짓한 작은 몸집으로 우리 식구 전부에게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존재니 말이다. 쉬이 무너지고 쉬이 흔들리는 부족한 인간을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몽실이는 나와 달라 참 이상하지만 추앙이란 낱말은 얘처럼 너른 마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존재에게 참 어울리지 않는가. 

 아무잘못 없이 누군가 휘두른 흉기에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한 환경미화원 아주머니 소식을 접했다. 산책길 만나는 누구에게든 오라면 반갑게 가는 몽실이처럼 인간의 마음에서 흑심도 사심도 의심도 사라진다면 저런 끔찍한 소식을 접할 일은 없을 텐데 안타까웠다. 내가 부르면 찜통도 따라 들어갈 몽실이의 충정이 오늘따라 참 과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는 짓마다 물색없고 악의 없어 혼내는 내가 오히려 나쁜 사람이 된 듯 묘한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키는 몽실이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가끔 혼잣말을 한다. “어는 어느 별에서 왔니? 참 신기하고 이상하지만 귀한 생명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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