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을 사랑하지 않는 직장인이 있을까.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흐린 날 탓일까.
갱년기 탓일까. 몸도 마음도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얼마 전, 상담을 하는 데 17살 자폐 학생 준희(가명) 엄마가 자기는 요즘 아이와 죽을 날을 헤아려 본다고 했다. 툭.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상담 내내 그 엄마에게 도움도 안 될 말을 주절거리긴 했지만 그 엄마의 마음이 계속해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아이의 생을 쥐고 흔들 권리는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오죽하면 같이 죽을 생각까지 했을까 싶었다.
반면, 보름(가명)이와 희망(가명)이 남매 엄마와 통화 후에는 마음이 훈훈해져 온기가 돌았다.
보름(가명)이는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이다. 공교롭게도 올해 동생 희망(가명)이까지 맡게 되어 보름이 가정과 2년째 연을 맺고 있다. 보름이 엄마, 보름이, 희망이는 모두 지적장애가 있으며 보름이 엄마는 보름이 아빠 가족의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했다고 했다.
작년에 보름이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찌는 여름에 두터운 봄옷을 입고, 추운 겨울에 초가을에나 어울릴 법한 홑 잠바를 교복처럼 입고 다니던 학생이었다. 상의는 늘 소매가 짧았고 하의는 늘 발목을 덮지 못했다. 워낙 마른 터라 다섯 살은 더 어린 딸의 옷을 챙겨주면 소매가 반질반질할 때까지 그 옷만 입던 보름이.
엄마가 고모와 친조모에게 괄시당하는 걸 보고 자란 아이는 표정이 늘 어둡고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무시와 차별적 시선을 의식하는 아이였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여하튼 아이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졌고 그 일자리 덕에 보름이는 이제 여느 평범한 이십 대 풋풋한 젊은이처럼 활기차 보인다.
상담차 전화를 건 내게 보름이 엄마는 막내 아들 희망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름이 시집갈 때 주려고 보름이 월급 상당 부분을 저축하고 있다고 했다. 보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냐는 말에 그건 아니라고 수줍게 웃는 보름 엄마. 남들이 보면 참 안 된 가정형편이라 생각할 조건에서도 알차게 알콩달콩, 서로를 위하며 사는 보름이네 집을 보면 맑은 밤하늘에 휘영청 뜬 노란 보름달 보듯 마음이 환해진다.
가끔 가족이란 뭘까 곰곰이 생각한다. 세상엔 보름이네처럼 사는 집도, 준희네처럼 사는 집도 또 우리 집처럼 사는 집도 부지기수며, 지금 우리 집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그리 특별하단 생각은 안 한다. 이 세상에 삶이 의미 없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숱할까.
얼마 전 함박꽃처럼 얼굴이 빛나는 배우가 매일 아침 눈떠지는 게 너무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모습을 TV에서 봤다. 하루하루 삶의 의미를 지워나가며 눈 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대강 먹고 치우고 자기 바쁘던 나는 그 배우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나의 과거를 되짚었다. 왜 난 그녀처럼 새날에 대한 기대가 없으며 가끔은 아침에 눈이 안 떠지길 바랄까.
어떤 결과에 개인이 미친 영향이 없을 리 만무하다. 내가 지금 불행하다면 내 마음과 내 행동, 내가 맺는 관계가 빚어낸 결과일 거다.
애초에 희망과 기대가 없으면 절망할 일도 없다.
삶의 의미는 찾는 사람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법.
존재의 이유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 자체.
잠시 보름이네가 부러웠지만 보름네처럼 언젠가 웃음꽃이 피길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준희 엄마가 조금은 더 행복하길 바라지만 섣부른 위로는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의 삶은 그 개인의 바람과 아무 상관 없이 흘러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