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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코코 May 28. 2024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2)

나에게 영지주의를 가르쳐준 해럴드 블룸에 감사하며

나는 원래 세계적인 문학 평론가인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2편 정도의 글로 내 의견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가  쓴 책들을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끝없이 이어지는 그가 만들어낸 지식의 계곡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의 계획을 바꿔서 위대한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약 10편 이상의 글을 작성하여 그에 관한 내 의견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미국 문학 비평계의 거목이자 주요 문학 평론서의 저자인 해럴드 블룸은 고전부터 현대 문학에 걸쳐서 영어권 이외에 다른 나라 언어의 문학에도 폭넓게 넘나들며 문학에 대한 사랑을 담아 시대를 초월하는 100명의 언어 천재들을 탐구했다. 탁월한 독서가이며 광적으로 문학 작품에 매달린 그의 인생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인류 문학은 한걸음 더 진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지독하게 보수적이고 어쩌면 포용력이 넓은 성격이 아니어서 상처를 받은 문학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인류 문학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제는 인류 문학에 대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해 나가야만 한다는 각성의 소리가 나오게 만들기도 했다.

문학의 길로 뛰어드는 사람이거나 혹은 문학책에 깊이 빠져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헤럴드 블룸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독서를 하고, 그가 안내하는 대로 문학작품을 써나갈 것을 나는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전 세계의 문학을 올바로 공부하려면 혹은 독서를 통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고전 문학과 현대 문학을 망라하여 욕심내어 깊은 내용을 독파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해럴드 블룸에게 배우는 방법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의 주장에는 한편으로 다소 편협한 시각이 있었고, 그의 거침없는 주장에 여러 작가들이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그의 비판적 통찰력은 세계 문학계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정설로 남아 있다. 그의 강하고 한결같은 주장은 지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개념을 구축하면서 인류의 문학에 여러 번 경종을 울렸다. 그의 해박한 논리에 관하여 그를 뛰어넘는 논리로 반박한 평론가든 작가이든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지적 충만함에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신감 있게 정의 내린 그의 평론에 의해서 노벨  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도 그 가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류 문학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압도하고 멀리 앞서나가면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소리치고 있다. 지적인 탐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했던 '해럴드 블룸'은 죽기 며칠 전까지도 공부하고 강의하였다. 나는 그가 세운 문학에 대한 개념 정립에 한없는 존경을 보내면서 그가 정의한 문학 평론에 대하여 감사의 의미로 언젠가는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특히 그는 고전을 다루면서 종교의 영향력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인류 문학의 발전, 더 나아가 인류 역사의 발전은 어쩔 수 없이 종교의 영향력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가 '카발라 사상'에 입각해 문학 작품을 탐구한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영지주의'를 기초로 문학을 이해하고 판단한 사실에 관하여,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의 탁월함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영지주의'는 사실상 중세 종교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는 종교의 억압에 투쟁하던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인류 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초로 삼았다. 나는 이 점에서 해럴드 블룸이 연구했던 고뇌의 흔적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 그가 종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황은 아닌가 우려스러운 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문학이 종교의 힘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사실에는 매우 부정적이었고, 부득이 종교의 역사 속에서 문학의 선구자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끊임없이 추진하였다. 그리고 결국 '영지주의'에 입각해서 세계 문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처럼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문학의 심오한 깊이를 다루었던 문학 평론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영지주의에 관하여 고뇌의 밤을 쉬지 않고 이어나가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공감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는 문학이 종교에 지배당해 왔던 사실이 부끄럽고 두려웠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다. 문학이 종교에 휘둘리는 순간 정의는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종교는 미개한 시대의 제왕이었고 정의도 철학도 모두 삼키는 거대한 존재였다. 문학과 철학은 종교를 뛰어넘어야만 인류에게 위대한 선물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종교는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 적어도 문학과 철학은 종교를 거꾸로 지배해야만 한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종교를 압도해야만 한다. 이런 철학을 해럴드 블룸은 나에게 철저히 심어주었다. 그가 영지주의를 문학에서 다루게 된 이유는 중세와 근세까지 과학의 힘이 부족했기에 우리는 부득이 종교에 속박당했지만, 영지주의자들의 노력으로 종교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 것이다. 이렇게 중세에는 심지어 고대에도  영지주의자들의 힘겨운 건투와 외로운 여정으로 어두운 역사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는 이런 지주의자들의 고귀한 과정을 추적하면서 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노력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끝없이 계속하였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언제나 정치와 종교 등 힘의 권력에 맞서 홀로 이겨내면서 문학과 철학을 통하여 선구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에 인류의 철학과 문학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일 수 있다. 나는 요즘 해럴드 블룸이 찾아낸 영지주의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삶도 바꿔야만 한다고 결심했고, 나에게 이들을 소개한 해럴드 블룸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무언가 보답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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