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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코코 Jul 20. 2024

문학 작품의 번역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

영어와 일본어에 치중된 우리의 번역 시장을 다른 언어로 더 넓혀야만 한다

내가 지난 브런치 스토리에서 안정효 작가님에 관하여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원래는 우리나라의 번역 시장이 영어와 일본어의 작품에만 극단적으로 치중되어 있는 상황에 하여 지적하고 싶었던 마음에서 쓴 글이다. 이 세상에는 프랑스어독일어과 스페인어와 러시아어 등의 언어로 혹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언어로 쓰인 훌륭한 문학 작품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가 지금 영어권 작가와 가까운 일본 작가의 작품에만 너무 몰입해 있는 상황은 아닌가?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 진정으로 중요한 이유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영국의 맨부커상에서는 번역한 작가에게도 똑같이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작품은 이 책의 번역가인 데보라 스미스가 없었다면 수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나도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강 작가를 진정으로 존경하지만, 그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오히려 채식주의자 작품은 좀 부족한 작품이다. 어쩌면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의 실력에 의해서 맨부커상이 더 결정된 것 같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한강 작가의 빼어난 다른 여러 작품을 놔두고 왜 하필 이 작품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는지 처음에는 좀 의아했지만, 나는 곧바로 그 이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번역자의 실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문학 작품의 번역은 창작하는 작업만큼이나 중요한 행위이다. 그래서 맨부커상은 번역가의 역할을 작가와 똑같이 인정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맨부커상이 번역자를 높이 평가하는 행위는 진정으로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영어가 자국의 언어라서 당연히 영문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은 다른 언어의 작가들이 자기들에 비하여 많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미국의 문화가, 영어권의 문화가 이토록 인류를 온통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나를 고민하게 만들고 심지어 슬프게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문학을 넘어서 인류가 처한 거의 모든 상황에서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과 러시아도 자기 나라 안으로 미국 문화가 침투하는 일은 원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일반화하고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일이 처리되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다. 이처럼 미국의 문화와 영어의 영향력은 정말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구글 등에서 검색 가능한 정보의 양을 판단하면, 언어의 측면에서 영어가 거의 70% 가까이 되는데 비하여 한국어의 검색 양은 약 0.6% 정도하고 하니, 이런 것이 바로 언어와 화의 영향력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결국 영어를 우선 잘해야만 우리가 필요한 정보의 취득면에서도 뒤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환경은 우리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이제는 심지어 미국에서 개발한 AI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니 현실은 점점 더 영어권의 상황으로 고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내용 문학의 측면에서 다시 옮겨서 정리한다면, 어떤 문학 작품에 관하여 평가하고 싶다면  우선 작품이 영문으로 표기되어야만 세계적인 문학상에서도 심사 대상이 될 수 있고, 영어권의 수많은 독자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즉  한국어로 된 작품을 영문으로 잘 옮겨야만 그 책을 읽고 영어권 독자들이나 문학상 심사위원들에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문학에서도 언어의 차이가 여전히 큰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문이 아닌 그 이외의 다른 언어로 문학 작품을 쓴다면, 이런 언어에 따른 현실적인 한계는 우선 지닌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영문으로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게 어쩌면 현명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어의 한계를 깨닫고 고등학생 때부터 직접 영어로 소설을 쓴 분이 바로 내가 지난 브런치 스토리에서 소개한 '하얀 전쟁의 안정효 작가님'이다.


내가 해럴드 블룸을 존경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영어권 작가, 특히 미국 작가에게만 유독 후한 평가를 내리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가 정한 세계 최고의 문학 작가 100인은, 다른 언어에는 관대하지 못하고 주로 영어권 작가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러시아의 거장 알렉산드르 푸시킨,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타고르, 레바논계 시인 칼릴 지브란 등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시인들에 관해서는 거의 영어권의 시인에 집중되어 있는 단점을 지닌 채  세계 최고 문학가 100인을 선정하였다. 해럴드 블룸은 중국의 고대 철학자들을 완전히 제외한 잘못된 결정과 더불어 위의 위대한 시인들도 100인에 넣지 않는 단점을 지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가 영어권을 중심으로 빛나는 100인을 선정한 용기는 박수를 쳐줄만한 행동이다. 그래서 비록 그가 주로 영어권 작가들에게만 후한 점수를 준 결과도 어느 정도 이해하면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 절대로 좋은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소설에 대하여 해럴드 블룸이나 다른 영어권 작가들이 그들의 선배인 이 미국인 작가에게 냉정하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심할 정도로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비딕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낮은 소설 기법이 많이 들어있기에 내가 다시 한번 이런 사실을 더 강조하려고 한다. 또한 헤밍웨이의 가벼운 소설처럼 영어권 작품에서는 단지 영어로 쓰였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성공한 작품이 무수하게  많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가까운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 대부분은 헤밍웨이의 작품보다 훨씬 더 매우 가볍고 부족한 결과물이라고 나는 강하게 주장한 것이다.


문학 작품에 관하여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인기를 끌었다는 우리의 작품들 상당수는 상당 부분 여러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 번역 작품에서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 내가 전편의 안정효 작가님을 다루면서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는 실력 있는 번역가가 없다는 이야기를 거론했는데, 다시 한번 최근에 내가 직접 겪었던 충격적이고 창피한 일을 소개하겠다. 나는 대학 시절에 학교 도서관에서 프랑스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단숨에 읽은 경험이 있다. 점심 식사도 거르고 학교 수업도 빼먹으면서 나는 '보바리 부인' 문학 작품에 흠뻑 심취해서 그 자리에서 2번을 계속 연거푸 읽었다. 그리고 "프랑스 소설에는 이런 대단한 소설도 있구나!"라고 감탄을 하면서 며칠 동안 이 작품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보바리 부인처럼 단숨에 읽은 책은 지금까지  20여 의 작품밖에 없었다. 그런데 약 8개월 전에 나는 대학 시절에 읽은 보바리 부인 작품을 다시 읽었는데, 내가 학생시절에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그 내용과 전혀 달랐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20% 정도의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나는 너무 놀라서 당황하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이 작품에 대하여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대학 때 읽었던 보바리 부인은 "태풍 같은 심한 비바람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보바리 부인이 애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다가 마차가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주인공이 애인과 같이 사망하는 내용으로 나온다." 그런데 내가 8개월 전에 다시 읽었던 보바리 부인에서는 "주인공 보바리 부인은 애인에게 버림받고, 자기가 저지른 낭비벽에 의해서 사방에서 조여 오는 빚쟁이들에 시달려다가 너무 힘이 든 나머지 주인공이 스스로 비소를 먹고 자살하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는다." 나는 즉시 보바리 부인의 여러 번역책을 찾아서 더 읽어보게 되었다. 그 결과 내가 최근 8개월 전에 읽는 내용이 실제로 프랑스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내용과 일치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대학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과거의 '보바리 부인'은 왜 뒷부분의 글이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던가? 내가 이 책을 1980년대에 읽었으니까 어쩌면 1970년대에 번역된 책일 가능성도 있다. 그때에 이렇게 완전히 거짓으로 번역한 내용으로 보바리 부인 작품인쇄하여 출판한 것이었다. 내가 만약 8개월 전에 다시 보바리 부인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대단한 작품의 내용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살아갔을 것이다. 세계적인 프랑스 작가 위대한 구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보바리 부인, 이런 인류 최고의 작품 내용을 나는 지금껏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나쁜 행위는 그 당시 번역자와 출판사 모두의 잘못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어느 독자 중에서 혹시 나와 같이 이렇게 잘못된 번역서를 읽은 분이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지금 생각하니 단지 허탈하고 헛웃음만 나온다. 우리의 문학이 이처럼 아직 형편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스페인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를 대단히 잘하는 전문가가 빈약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거짓으로 번역된 문학책으로 읽었다는 답답함이 내 머릿속에서 한참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영어와 일본어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언어에서는 올바르고 뛰어 난 실력 있는 번역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나리오와 감독과 배우와 자본과 첨단 과학이 총동원되어야만 영화의 완성도가 뛰어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할리우드만큼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 영화인들이 할리우드만큼 영화를 잘 연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결과는 우리의 영화인들의 노력과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문학 작품을 쓰는 일이 영화를 제작하는 일에 비하여 미국인의 실력이 다른 나라 작가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영화는 감독 혼자의 실력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카메라, 영화 세트,  배우, 제작 비용 등 수많은 협업이 잘 이루어져야만 완성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할리우드를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인재의 유무를 떠나서 바로 이러한 자본과 첨단 과학의 기술과의 일사불란한 협업의 문제이다. 그런데 문학 작품은 작가 개인의 역량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만들어지는 예술 작품이다. 따라서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에서도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도 더 많은 우리의 문학 작가를 발굴해야만 하는 것과 동시에 더 많은 제3 국 언어의 번역가들을 키워야만 한다. 즉 우리가 실력 있는 제3 국  언어의 번역가들을 양성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것도 우리의 문학 역량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번역가 여러분과 번역가 지망생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영어와 일본어 이외에 다른 언어로 쓰인 주옥같은 작품들이 전 세계 곳곳에 무수히 잠재되어 있고 그런 문학작품들이 여전히 우리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득이 영어권의 책과 일본어의 책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제는 다른 제3 국의 언어로 쓰인 귀한 문학 작품들을 발굴하고 번역하여 우리 독자들에게 선물해 주는 일에 더 힘써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특히 가까운 중국의 작품은 번역되는 총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따라서 중국어 실력자들이 앞으로 많은 중국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우리의 문학시장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길 고대한다. 내가 한국 문학책과 영어권의 문학책, 그리고 일본어 문학책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어쩔 수 없이 한국 문학 이외에는 영어와 일본어 문학의 번역서가 우리 출판 시장에서 넘쳐나기 때문이다. 나도 대부분의 독자처럼 번역책에 의지해서 외국 문학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앞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 쓴 문학작품들도, 영어권 문학작품을 자주 보듯이 봇물처럼 우리의 문학 시장에 쏟아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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