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슐뢰겔 (Karl Schlögel)
칼 슐뢰겔(Karl Schlögel, 1948년생)은 독일의 대표적 동유럽사 연구자로서, 현대 러시아와 소비에트 사회, 그리고 동유럽의 문화사와도시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철학/사회학/슬라브학/동유럽사를 공부했다. 1990년부터 콘스탄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1994년에는 프랑크푸르트-오더의 유럽대학교 비아드리나(Europa-Universität Viadrina)로 자리를 옮겨동유럽사를 가르쳤다.
슐뢰겔의 연구는 정치사적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도시 공간, 일상생활, 물질문화와 같은 구체적 차원을 통하여 역사적 경험을 재구성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스탈린 시대 소련의 테러와 유토피아, 소련 사회의 생활세계, 러시아 및 동유럽의 문화적 기억을탐구하는 작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독일 연방공로훈장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으며, 2025년에는 독일도서협회의 평화상(Friedenspreis des Deutschen Buchhandels)을 수상했다.
대표작
슐뢰겔의 저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테러와 꿈: 모스크바 1937년(Terror und Traum. Moskau 1937)』이다. 이 책에서 그는 스탈린 체제의 절정기였던 1937년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국가 폭력과 유토피아적 이상이 어떻게 동일한 시공간 속에서 공존했는지를 탐구하였다. 도시 공간과 일상생활의 구체적 풍경을 통해 공포와 희망이 뒤섞인 스탈린주의의 이중적 성격을 재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저술로는 『소비에트의 세기: 사라진 세계의 고고학(Das sowjetische Jahrhundert. Archäologie einer untergegangenen Welt)』이 있다. 이 책은 20세기 소련 사회 전체를 고고학적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로, 정치적 사건뿐 아니라 아파트, 교통수단, 생활용품과 같은 물질문화와 공간적 질서를 분석하여 소련을 하나의 생활세계이자 문명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 외에도 『페테르부르크 1909–1921: 근대의 실험실(Petersburg 1909–1921. Das Laboratorium der Moderne)』에서는 혁명 전후의 페테르부르크를 근대성의 실험장이자 문화적 창조의 무대로 조망하였으며, 『우크라이나의 교훈: 키이우에서의 결정(Entscheidung in Kiew. Ukrainische Lektionen)』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을 현대사적 맥락에서 분석하였다. 또한 『우리는 공간에서 시간을 읽는다(Im Raume lesen wir die Zeit)』와 『동쪽으로 치우친 중심(Die Mitte liegt ostwärts)』 등에서는 공간과 장소, 이동과 경계라는 관점을 통해 동유럽과 중앙유럽의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고자 하였다.
작가의 한 문단
- 『소비에트의 세기: 사라진 세계의 고고학(Das sowjetische Jahrhundert. Archäologie einer untergegangenen Welt)』 중에서, 김인건 번역
서구 도시에서 쓰레기는 기물 파손과 마찬가지로 방치에 의한 황폐화, 국가 또는 지방 자치 단체 서비스의 철수, 익명성과 무질서 공간의 출현을 나타내는 좋은 지표다. 소비에트 시절 사회와 국가는 공공장소에 쓰레기 방치되거나 버려지지 않도록 통제했다. 하지만 일자 우테친(Ilja Utechin,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인류학 교수)이 원칙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시민들은 자신만의 잘 정돈된 사적 영역에만 책임을 느꼈다. 사실 지방자치단체 외에는 아무도 공공장소나 모두를 위한 공간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대로변 산책로와 문화 및 휴식을 위한 공원에는 고전주의 양식의 꽃병 모양에 은색으로 칠해진 “유골단지“라는 이름의 쓰레기통이 비치되어 있었다. 신발에 눈이 녹아 뭉개진 날조차 지하철 역사의 타일은 반짝였다. 시설 관리인인 드보르니키(Dworniki, 러시아어로 관리인이나 청소부 등을 뜻함)는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시했으며, 때에 따라서 위반 사항을 처벌했다. 그들은 건물 입구, 인도, 로비, 역사, 공공 광장, 전시 공간, 근거리 및 장거리 열차의 복도를 끊임없이 쓸고 닦았다. 소비에트 시민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것 중 하나는 일부 지역에서 봄마다 되풀이되었던 '수보트니키(Subbotniki)'다. 수보트니키는 주말에 실시되는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집단 노동으로, 봄에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드러난 오물과 쓰레기를 치우고 정돈하는 작업이었다. 가을에 다차(dacha, 작은 건물이 있는 주말농장) 지역을 뒤덮던 냄새도 잊히지 않는 것 중 하나다. 낙엽이나 여름 작업의 잔해들을 쓸어 모아서 태우는 냄새였다. '공공 공간의 청결'에 일정한 권한을 가진 직원이나, 쓸고 닦는 활동 모두 공공 또는 준 공공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이는 그 자체로 질서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