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로 만난 철학자
번역되지 않은 책, 번역되지 않는 사회 1
Isolde Charim, <Qualen des Narzismus – Über freiwillige Unterwerfung>
스위스의 공영방송 SRF에서 1994년부터 방영하고 있는 <대전환의 시간 철학(Sternstunde Philosophie)>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주목받는 학자, 문화 및 예술 인사, 종교인, 정치인 등이 나와 특정 주제에 관한 대담을 나누는 독일어 TV 프로그램이다.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는 해당 방송이 나에게는 신세계였다.
책으로만 만나던 학자의 깊이 있는 대담을 1시간가량의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니. 국제적으로 알려진 철학자로 악셀 호네트, 아그네스 헬러, 슬라보예 지젝, 마이클 샌델, 피터 싱어 등이 출연했고, 분야는 다르지만, 토마스 피케티, 유발 하라리, 노암 촘스키,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도 초대되었다. 대담의 진행자들 또한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 방송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 프로가 나에게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최근 주목받는 독일어권 인문사회과학 분야 도서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화제가 된 책을 저술한 학자를 초대해 책의 내용에 관한 대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방송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청자는 방송을 통해 이미 관심이 있었거나, 기준에는 몰랐던 책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경우 책의 제목이나 간략한 리뷰로는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막상 유명세에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예상했던 것과는 내용이나, 책의 수준이 달라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럴 때 책의 내용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다루는 대담이나 강연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선택하거나 읽어가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독서로 이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런 점에서 독일어권의 인문사회과학 도서 시장은 한국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독일어권 국가가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런 내용을 다루는 TV나 라디오 방송이 여럿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 분포된 대학이나 사회기관의 연구소나 재단에서 학자나 저자 초청 강연과 대담을 자주 진행한다. 최근에는 이런 강연이나 대담을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2022년 출간된 이졸데 카림의 <괴로워하는 나르시시즘> 또한 책의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으며 세부 내용을 통해 작가의 문제의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꼼꼼한 독서가 필요하다. 2023년 1월 카림은 이 책을 들고 <대전환의 시간 철학>에 출연했다. 이것뿐 아니다. 저자가 참여한 해당 책에 대한 서로 다른 대담 영상을 유튜브에서 다섯 개나 발견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카림과 대담을 진행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책을 읽으며 유튜버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당신의 책은 왜 많은 사람이 유튜버가 되고 싶어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튜버는 개인이 자신이 가진 독특한 특성, 혹은 자신의 특성이라고 믿는 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회수 좋아요 등 즉각적인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독특한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높은 평가를 받고 성공하기 위해 유튜버가 되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철학책이나 이론 사회학 책이 그런 것처럼 이 책 또한 다양한 기존 이론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가장 중요하게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이 차용되고 있다. 저자는 초자아와 자아이상을 대비시켜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설명한다. 과거 사람들은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지도자(아버지, 초자아)에 굴복했다면, 현대인은 이상적인 자기 자신(스타, 자아이상)이 되기 위해 자신의 규율을 따른다.
하지만 현대인이 추종하는 자아이상은 물에 비춘 나르키소스의 모습처럼 실재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모습이며, 늘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다. 카림은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적인 자아가 되라는 명령이 현대의 이데올로기이며 현대 사회를 작동시키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객관적인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통해 각종 순위, 평가 시스템에 전방위로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의 괴로움을 설명한다. 현대인은 정상인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저자가 이미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현대를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하려 한 시도도, 평가와 랭킹 시스템을 통해 설명하려 한 시도도, 유일하고 특별한 개인이 되려는 욕구로 설명하려 한 시도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독창성이 있다면 저자가 나르시시즘을 현대인의 도덕적 근원, 초자아를 대체하는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이론에서 나르시시즘은 사회의 정상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한편에서 공동체가 작동해야 했다. 하지만 저자는 나르시시즘 자체가 전방위적인 도덕의 근원이 되었으며, 사회의 정상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진단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새로운 도덕을 통해 스타를 추종하는 현상, 랭킹, 신자유주의 지배 이데올로기, 코로나19 방역 규정을 따르는 사람, 기후보호 운동까지 매우 광범위한 현대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전작 <Ich und die Anderen(나와 타자들, 민음사)>에서 다민족 및 다양한 정체성을 통해 다원화된 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을 보여주며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이번 책에서도 카림은 동시대의 모습을 나르시시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으며, 이것이 정체성 정치의 도덕적 작동 원리 또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과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카림은 <나와 타자들>로 하노버 철학 연구소에서 수여하는 ‚철학도서상‘과 오스트리아 정부가 수여하는 ‚문화출판상‘을 받았다. <괴로워하는 나르시시즘>으로는 철학 에세이에 수여하는 „트락타투스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