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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Jun 06. 2024

상추만요?

부럽다는 말이 주는 헛헛함

 벌써부터 땡볕이라 낮 동안은 밭에 나갈 엄두를 낼 수가 없다. 모자로 햇볕을 가리고 쿨토시로 팔과 얼굴을 싸매도 고무장화를 신은 발등이 뜨거워서 낮동안은 그늘에서만 작업하다  4시쯤 해가 한풀 꺾이면 본격적인 밭일에 돌입한다. 모레부터 많은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있어서 신랑은 모종 심기 바쁘고 나는 옆에서 상추를 따서 담는다. 아직 첫물인 상추는 여리디 여려서 비에 버티지 못할 것이므로 부지런히 따서 담다가 지인이 생각나 전화한다.  " 지금 상추 따고 있는데 가져다줄까?" 지인의 직장이 울 집에서 도보 3분쯤 거리이므로 중간에서 만나기로 하며 상추봉지를 들고 간다. 야채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멀리서도 이미 함박웃음인데

날 보자마자 하는 말이 "부러워!"이다. 그저 같이 웃어주고 상추를 들려주고 돌아오는데 그 부럽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신도시에서 시골로 이사와 1년도 안 되어 코로나를 겪게 됐다. 학교에서 한 명의 확진자가 생기면 학교를 폐쇄하던 시기를 조심스레 지나서 소규모 모임은 가능하던 때. 여전히 아파트에 사는 나의 친구들과 아이들이 놀러 와서 늘 하던 말이 그거였다. "부러워!"

뛰는 게 자유롭지 못한 아파트 생활에서 반년 넘게 갇혀있다가 마당에서, 텃밭에서 우리끼리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이니 저절로 나오는 소리였을 테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같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잘 놀던 그네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뭔가 모를 씁쓸함이 "부러워"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남았다.


지인은 상추가 부러운 거다. 신선한 야채를 먹을 수 있음이 부러운 거다.  그러나 그는 내가 모종을 사서 심고 매일매일 물을 길러다 주며 상추가 자라는 동안 풀메기한 모든 것은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 친구들의 부러움도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음에 대한 부러움이다.

문화생활의 부족, 인프라의 부족 이 시골에서의 불편함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텃밭 야채를 좋아하나,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좋아하나 결코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을 사람들의 부럽다는 말은 그래서 나에게 뒤끝이 씁쓸했던 게 아닐까?


상추뿐이랴 옥수수도 감자도 그 무엇이라도 그렇다.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운동선수들의 현재 연봉만을, 인기만을 부러워할 뿐.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투자한 모든 노력과 불편함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부럽다는 말이 가진 불편함에서 시야를 넓게 가져야겠다는 배움을 얻는다

그 누구의 성과라도 열매만을 가지고 가타부타 따지진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아픈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간병하는 사람의 노고를 배려해 줄 줄 알며  드러나지 않는, 티 나지 않고 굴러가는 모든 평범한 일상에서의 각자의 치열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오늘도 나를 모르는, 내가 모르는 '당신들' 덕분에 잘 살았다.

(경찰, 소방관, 의사, 인터넷기사, 브런치 운영자 등등등)

(경찰, 소방관, 의사, 인터넷기사, 브런치 운영자 등등등)


초여름 상추가 알려준 교훈 ->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길 것, '과정'에 대해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나부터 '과정'을 살펴보는 눈을 가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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