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비 오는 날이 싫었다.
눅눅한 습기와, 물이 흥건한 복도, 왠지 낮게 깔리는 분위기까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달까.
건설 현장일을 하시던 큰아버지께서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어감도 마냥 밝은 느낌은 아니어서 이래저래 비 오는 날이 대한 느낌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
여름 장마도 아니고 가을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소식에 깨 말리다가 멈칫 쌀 말리다가 멈칫 아니 갑자기 왠 비야 투덜대다가 이 비가 배추와 무에게는 단비가 된다는 말을 들으니 입이 조금 들어가게 된다.
얼추 가을걷이가 다 끝나고 또 한바탕 비가 내리는데 이젠 비 온다는 명분으로 마당에서 할 일을 미룰 수 있어서 빗소리도 반갑게 들린다.
비는 언제나 조용히 제 몫을 제 할 일을 할 뿐인데.
변덕스러운 내가 비를 미워도 했다가 귀찮아도 했다가 반기기도 한다.
비가 나를 보면 뭐라고 하려나? 너도 참 간사하구나 하려나? 그조차 씩 웃으며 제할 일 묵묵히 할 것 같다.
비가 이벤트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 좋다.
가을비도 달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라 좋다.
내가 배추를 키우지 않아도.
농사를 해보았다는 사실이 좀 더 넓은 마음을 만들어준다.
나는 햇볕이 필요해도. 비가 필요한 작물을 생각할 수 있다.
해서 비 오는 날은 공치던 날이라는 큰아빠의 어감이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겠다.
비가 와야 공식적으로 쉴 수 있었던 상황이니.
비가 온다.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