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안동찜닭 그 비법은 마무리
모든 일을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잘 맺는 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농사꾼이 때를 알아 설렘과 부지런함의 발걸음으로 씨를 파종해야만 거둠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고, 뙤약볕과 모진 날씨, 잡초와 벌레들과의 겨룸에서 이겨야 수확할 것이 있다. 그런 걸 다 알지만, 길어야 팔십인 삶에 대한 수확은 멀기만 하다.
명품을 휘두른 지인이 전교1등, 유학, 미국생활, 앞선 경력치고는 조금 초라한 지금 나의 형편을 비아냥거리며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뭐냐고 이미 정해 놓은 대답이 듣고 싶은 듯 뻔한 질문을 했다.그 때 나는 주저했다. 웃픈 현실에 도망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속으로는 속사포처럼 ‘무식하게 돈만 많아 내게 자랑할 것이 그것뿐인 네가 하나도 부럽지 않다.’ 고 내뱉었지만 내 속된 입술은
“돈이 최고지.”
라고 말하며 그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마흔 중반의 현실은 그랬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여기까지뿐이랴. 팔십까지면 아직도 40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끝을 논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을까. 자식 농사도 이제 막 싹이 트는데 두고 봐야지 두려울 것 없는 인생에 역전 홈런은 못 해도 안타는 있을 거라고 난 끝에 반드시 웃을 거라고.....그 날, 올라오는 화를 얼마나 열심히 눌렀는 지 모른다.
내가 간절히 사고 싶은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불혹이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도 글을 쓰면서 꾸는 꿈,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내 삶의 온 힘을 다해 전해 주는 잔소리와 라떼로 후회 남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열망, 혹은 남편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젊은 시절 열렬히 사랑했던 따뜻하고 친절한 열정적으로 그 때 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젊은 날 팽팽했던 피부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것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더욱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은 유학 막바지 공부 중이었다. 음악을 전공했던 남편은 레슨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빠듯한 살림살이, 공부, 육아까지 그 누구도 그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 때,우리는 아주 작은 교회를 다녔다. 교회라는 조직이 아니라 우리에게 교회는 곧 가족이었다. 교회 언니와 오빠들은 우리보다 살림이 더 나은 것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들도 각 가정마다 셋 또는 넷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경제 사정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지금 내놓라한 기업이 되었지만 당시 빚에 허덕이면서 네 아들을 키우고 있었고, 어떤 이는 앞이 보이지 않는 직장생활에 힘들어 했었다. 그런데 우리 가정의 대소사에 물질적으로 마음적으로 늘 넘치도록 사랑을 주었다.
한 번은 첫 아이 돐 때, 천 불 정도를 받게 되었다. 물론, 그것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돌잔치 상이며, 꽤 비싼 카시트며 갚을 수 없을 은혜를 선물로 받았다. 그 때, 그들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제일 쉬운 거다'라고 말해주면서 우리의 마음의 짐을 덜어 주려 하였다. 돈 한 푼이 아쉬운 유학생에게 그 말은 이해라고 와 닿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나 우리도 그들의 나이쯤 되고 보니 그 말의 통찰을 알게 되었다. 냉동식품과 배달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이 나물과 김치뿐이더라도 시간으로 차린 밥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들에게 장난감보다는 같이 놀이터에서 놀아주는게 더 힘듦을 알았을 때, 부모한테 살 부대끼며 얼굴 한 번 더 보여주는게 말과 돈뿐인 효도보다 나은 것을 알았을 때 언니들이 했던 그 말의 참 뜻을 깨달았다.
가끔 내가 바랐던 나와 현실의 나는 격차가 상당히 멀었다. 불만족과 위기감이 덮쳐 삶이 송두리째 후회로 남는 어떠한 순간이 있었다. 학창 시절 철 없이 놀았던 어떤 지인은 철마다 해외로 골프 여행을 가고,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시집 잘 가서 사모님 소리 듣고 진작에 서울 30평대 아파트에 사는 이도 있다. 뭐, 돈이 인생의 결말이라면 그들과 나는 견줄 수 없지만, 삶을 그 사람이 지금 갖고 있는 많고 적음으로만 판단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르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아직 맺음에 대한 과정 중이다. 나는 그 맺음에 다가가기 위해 앞으로도 수없이 또 도전 하지 않을까. 그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평가 받을 테지만 자신있다. 20대였을 때보다 40대인 지금 난, 업글인간이기때문이다.
퇴직이 코 앞이다. 퇴직이라고 하기에 너무 짧았던 이력. 대체 근무직으로 급식실을 찾아와 얼렁뚱땅 정직원에 지원을 하고, 이력서에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대신 헌신과 봉사정신으로 무한희생을 강요당하는 듯한 조리실무사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 지 4개월만에 사직서를 던졌다. 영양사의 실수로 사직서가 책상 서랍 속에 한 달간 보관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달 더 발목이 잡혀버렸지만 아줌마들에게는 4대 보험 넣어 준다는 직장다운 직장.
불만을 얘기코자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급식실에서 경험은 내게 가장 화려한 경력과 기억을 선사했다.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추억. 지금도 얘기할 수 있는 건 '내 인생 사 가장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끝날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것. 7월 한 달, 퇴직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건만 퇴직을 일주일 남긴 사람한테 조차도 산업재해교육은 의무였다.
산업 안전 보건 교육이며 아동 학대 예방 교육, 4대 폭력 예방 교육까지. 날 평가하는 끝맺음은 내가 떠난 자리에 남은 자들의 수고가 귀찮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기에 주말을 반납하고 최선을 다했다. 내가 떠난 자리에 나에 대한 그리움 정도면 직장에서는 호평이지 않을까.
오늘은 안동찜닭을 만들어야 한다. 닭 요리는 급식메뉴 중 제육볶음, 고추장 불고기, 간장불고기 등등으로 이름만 바뀌어 자주 등장하는 메뉴이다.지난번에 짜장 찜닭을 해보았는데 이번에는 안동 찜닭이다.얼마 전, 휴가 때 경주에서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 가는 길 하룻 밤 안동에서 머물었던 적이 있다. 관광을 계획하고 간 곳이 아니라 무리한 귀갓길에 잠깐의 쉼으로 지나치기로 한 곳이어서 별 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저 시장통에 가서 유명하다는 안동찜닭을 먹어 보자고 합의한 정도, 딱 그뿐인 곳이었다.
여행의 막바지 발걸음에 집이 그리워 그랬는지 줄 서서 먹는다는 찜닭의 맛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단, 특이한 점 한 가지는 닭이 어떤 처리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할 정도로 탱글탱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 그게 핵심 비법이었던 것 같다. 닭을 지지고 볶고 끓이다 보면 살이 퍼석거리면서 결국 으스러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안동찜닭은 그렇지 않았다. 닭을 따로 삶지 않고, 말 그대로 찌는 것 같았다.
양념이야 우리네 양념에 그리 특별할 것이 없지 않은가. 매우면 고추장이요 달달하면 물엿이나 조청, 설탕이요 짭짤하면 간장인데 그 사이사이 빈 맛을 메우기 위한 각종 비법 양념은 육수일 수도 있고 msg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던 그런 비슷한 맛을 주부라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비법 홍수시대에 살고 있으니 누구나 다그 정도쯤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안동 찜닭의 맛과 색을 급식실에서 똑같이 재현하기 위해 닭을 찌는 번거로움은 조금은 사치가 아닐까. 그러니 안동 찜닭도 볶음탕처럼. 그래도 미현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역시나 미현이는 더 잘 해내고싶어 하는욕심이 있었다. 작은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기차화통 삶아 먹은 듯한 목청은 또 어찌나 큰 지. 뜨거운 솥단지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때, 미현이가 “혜성아!” 부르면 부산까지 가고 있는 정신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오늘도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땀방울에 눈이 따가워 미칠 지경인데 미현이는 주방을 호령하며 양념을 이것저것 가져다가 찜닭에 휘리릭 넣었다. 나와 혜진언니는 어제처럼 삽을 들고 솥단지 옆을 지키는 군인이 되었다. 상병의 명령에 복종하느라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같은데...... 후훗’
주방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미현이를 보고 있으니마치 '라따뚜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앞치마에 가려진 작은 체구로 양념통을 들고 여기저기 누비느라 바빠 보였고, 눈빛에는 뭐랄까 또랑또랑함 그러나 조리장이라 하기엔 모자란 부족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미현이는 주방 전체를 향해 레이더를 켜고 있었고, 눈짓하나 손짓하나 허투루 낭비함 없이 주방 곳곳을 적시에 누빌 수 있을 만큼 노련함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가 최전방인가.
“엎어!”
잘 삶아진 닭을 식힌 후, 부글부글 끓는 양념에 부었다.
“져어! 살 부스러지지 않게!”
일사불란.
“고추! 빨간 고추로 마무리!”
“지금이야! 빼”
안동찜닭의 핵심은 마른 고추. 안동찜닭의 맺음은 마른 고추였다. 색감도 살리고 맛도 살리고. 매콤 알싸한 고추향의 찜닭은 제법 그 이름에 가까웠다. 마파두부만큼이나 미현이는 찜닭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남다른 찜닭을 완성해 보고 싶어 했다. 급식실에서 누구는 그런 미현이의 시도를 비웃는다. 아무렇게나 하면 어떠냐고 말이다. 그러나 미현이는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4개월 전보다 더. 아마 4년 전보다 훨씬 더. 미현이는 올해 급식실 5년 차. 회사 직위로 따지면 팀장정도는 되겠지. 미현이는 내가 사직서를 냈을 때 붙잡지 않았다.
“혜성아! 난 붙잡지 않아. 다른 데 좋은 데 있으면 나도 불러.”
솔직했다. 다른 이들은 ‘나와 같이 이 힘든 일을 하면서 같은 형편의 위안이 좀 되어보자.’라는 속내를 숨기고
“왜 그만둬? 이 일만 한 게 없어. 같이하자. 너 갈 데도 없잖아.”라고말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미현이는 정직했다. 속을 숨기지 않았다. 미현이의 말과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싫으면 싫다 표현이 정확한 아이였다. 그리고 일을 정말 끝내주게 잘하는 녀석이라 배울 것이 참으로 많았다. 작은 키에 콤플렉스도 있을 법하건만 깊은 솥단지 속에 긴 삽을 넣고 삽질하는 게 어려울 텐데도, 소쿠리에 담긴 무거운 고기의 중량을 이기지 못해 솥으로 딸려 들어갈 수 있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 스스로와 담당 팀원까지 도와주는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미현이가 그 동안 겪었을 많은 일들을 내가 감히 무어라 지레짐작할 수 있으랴. 그 아이가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존경스러웠다. 앓는 소리 한 번안 하는미현이와 함께여서 지옥 같은 세척실도 괜찮았다.
“혜성아!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했어.”
“조금만 하면 된다. 힘내!”
1600개의 식판을 다 기계에 넣고, 얼마 남지 않은 바트를 넣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식판을 받고 소독기에 넣던 미현이가 밝은 얼굴로 힘내자고 소리쳤다. 든든한 전우. 그 녀석은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던진 나를 뭐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부끄럽다.
“혜성아! 이제 얼마 안 남았네. 참 아쉽다.”
장화를씻고 나서 휴게실로 들어 가면서 내 어깨를 툭 치며 했던 굵은 그 몇 마디가 묵직했다. 나와 짝이면 가르칠 것도 많고 하라고 해야 할 것들도 많아 귀찮을 법도 하건만 언제나 나랑 해서 편하다고 해준 동갑내기 친구가 참 고마웠다. 미현이의 안동찜닭도 마파두부도 누군가는 국물이 많네 소스가 묽네 어쩌네 하며 핀잔을준다 하여도 '모두 멋진 도전이었고 정말 맛있었고 훌륭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미현아! 난 네가 진짜 멋있다.’
급식실의 일도 이제 이틀 후면 드디어 끝이다. 슬프다. 이곳에서도 참 괜찮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다. 나를 늘 응원해 주고 따뜻하게 불러 준 고마운 사람들. 나는그들에게 어떤 맺음으로 남을까. 매듭지음이 아쉬운 오늘. 그래도 나는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