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by MAMA

긴 추석 연휴에 딸 둘은 응답하라 1988에 빠졌다. 덕선이의 남편을 찾는 것이 드라마의 큰 맥락과 주제였음에도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함은 금세 잊어버린다. 어쩜 그렇게도 그 시절을 잘 그려 내었는지 보고 또 보아도 명작이다. 일단, 주인공들의 옷차림은 당시 나라 전반의 부족함에서 오는 초라함을 잘 보여 준다. 복권에 당첨되어 천지개벽한 치타 여사님도 늘 호피무늬에 원피스에 조끼를 걸치고 있다. 그 집 아들 정팔이나 정봉이도 옷차림이 수수한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인물들 중 제일 못 사는 덕선이네나 선우네는 말할 필요도 없다. 맨날 닳도록 입는 핑크색 맨투맨 티셔츠, 딱히 추위를 막아 줄 것 같지 않은 청자켓이나 더풀코트는 우리네 그리움의 표상이다. 1990년에 스무 살에 되는 70년생을 그린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1980년 생인 내 또래들에게도 특별한 다름이 없는 똑같은 부족한 시대를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즉, 70년생에게도 80년생에게도 당시는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다 부족했다.



나이키 운동화가 다 뭐며, 몇 십만원 짜리 패딩이 다 뭐대. 변변치 못한 코트나 이름 없는 나일론 점퍼로 추위를 견뎠다. 그래도 붕어빵은 넉넉했고, 떡볶이 1인분도 인심으로 후덕했다. 아무리 아파트라고 해도 윗집, 아랫집, 옆집을 꿰고 있을 정도로 친했고, 돈 몇 푼에 이웃을 의지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이웃집이 사촌보다 든든했었던 때도 있었다. 할 일 없이 길어지는 반상회는 또 얼마나 정이 넘치는지 반상회 때 어른들끼리 모이면 그날은 동네 아이들도 다 같이 모여 술래잡기를 하든 부루마블을 하든 당당히 밤늦도록 놀 수 있는 날이었다. 매일 고기반찬은 구경도 못해 분홍 소시지나 어묵볶음이 식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소고기라고는 생일날 미역국에 들어 있는 고기가 전부였지만 천 원에 콩나물과 두부를 살 수 있었고, 김장김치나 어쩌다 넘치는 감자 고구마라도 바가지에 담아 이웃에게 전하는 정감이 넘치는 때였다.



“엄마! 엄마 진짜 저랬어?”

“응! 진짜 다 저랬어. 겨울에 무슨 패딩이 있길 하니 변변한 운동화가 있길 했니. 딱 저랬어. 그런데 다 저렇게 살았어. 그래서 우리가 별로 다른 걸 못 느꼈었지.”

“저렇게 따뜻한 드라마가 또 나올까?”

“그러게 말이다. 저 시대가 진짜 춥긴 추워도 정말 따뜻했지.”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다. 피카추 돈가스와 순대 세 개를 꽂아 놓은 순대꼬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내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10시가 넘어 쏟아지는 밤 별과 찬바람을 맞으며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친구들. 그 정류장 바로 앞에 맛집 트럭이 있었다. 그 어묵 트럭은 인산인해였는데 한 손에는 뜨끈한 어묵 국물을 다른 한 손에는 소스 맛이 기가 막혔던 피카추 돈가스가 시린 겨울을 거뜬히 이기게 해 주었다.


우리 집은 아파트 14층이었는데 1호부터 4호, 5호부터 8호가 기역자로 꺾여 있는 구조였다. 8호 집은 쌍둥이 집이었다. 둘은 내 친구였고 둘 다 수영 선수들이었다. 7호 집은 언니의 담임 선생님 집이었다. 8호 집에 놀러 가려면 7호 집을 거쳐 가야 하는데 갈 때마다 뭔지 모를 후덜 거림이 있었다. 6호 집은 8호 쌍둥이 수영 선수들과 같이 수영을 하는 외동딸이 있는 집이었는데 수영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단신이라 늘 성적이 좋지 않아 그 집 아주머니께서 늘 걱정을 했다. 5호 집은 두 딸을 낳고 셋째도 딸을 낳은 집이었다. 셋째가 딸이어서 위로를 해줘야 할지 축하를 해줘야 할지 엄마는 늘 망설였다.


4호 집은 민족사관 고등학교를 다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는 집이었다. 가끔 주말마다 오는 민사고 교복을 입은 그 아이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면 교복 구경에 정신이 팔렸었다. 3호 집은 아이들이 없는 집이었다. 언제나 조용했고 2호 집은 내 동생의 베프가 있는 아들만 둘인 집이었다. 그 집 아주머니는 응답하라 1988의 도롱뇽의 엄마처럼 보험회사 왕이셨다.


이러니 반상회를 하는 날이면 윗집 아랫집 같은 층만 다 모여도 족히 스무 명. 현관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신발이 가득 찼다. 그날은 온 동네 현관문이 다 열려진 날이었다. 이 집에서 놀다가 저 집으로 저 집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놀이터로 그러다가 아파트 상가 슈퍼에서 월드콘이나 구구콘을 사 먹는 날이었다.



어쩌다 집에 돈이 똑 떨어져 옆집으로 엄마가 돈을 꾸러 가기도 했다. 한 번은 건넛동에 사는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심각하게 남편분 바람 난 이야기를 하셨고, 현장을 덮쳐야 한다고 우리 엄마 옷을 빌려 입고 가기도 했다. 아파트에서 엄마는 반장, 아빠는 동대표 교회에서는 성가대, 선교회 각 처에서 봉사만 십 수년 하시다 보니 인맥이 국회의원 선거를 나가도 될 정도여서 우리 집 문턱은 늘 이웃들의 왕래로 닳고 닳았었다. 별의 별일이 다 있는 한 해의 끝은 김장을 하는 날이었는데 그 추운 날에 온 동네 김치 나누어 주는 바가지를 들고 심부름 다니느라 투덜투덜했던 기억이 있다.



뭐니 뭐니 해도 하이라이트는 새벽송이었다. 요즘은 어떤 이유에서든 새벽송이 뭇매를 맞으나 그 당시 크리스마스 전 날에 울리는 새벽 캐럴 소리는 그렇게 듣기 싫은 이유만을 갖고 있는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새벽송이 들리기 시작하면 교회의 좋은 일에 초코파이나 오예스 한 박스 정도는 나누어 주려고 어느 집이든 기분 좋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 일이 그렇게 비난받는 일이 아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 집에 교회 식구들이 모여 커다란 쌀자루에 각 가정마다 준비한 선물을 넣으면서 준비를 시작했고, 새벽송을 도느라 아저씨들 집사님들 장로님들은 손이 꽁꽁 입이 꽁꽁 얼었다. 그렇게 시작된 새벽송은 새벽 서너 시가 되어 끝났고, 크리스마스 날에 큰 자루의 달콤함과 따뜻함은 어려운 이웃과 아이들의 선물이 되었다.



“요즘은 정말 풍족한데 많이 춥지?”

“엄마! 우리도 저 때로 돌아가면 좋겠다.”



딸아이는 그 아이가 살아 보지 못한 우리가 모두 어려웠던 그때를 진심으로 그리워했다. 응답하라 1988을 보고 또 보아도 또 재미있는 이유는 그때가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모자람이 주었던 낭만에 대한 아련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옆 집 아주머니가 주셨던 나물이 생각이 났다. 내가 퇴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옆 집 아주머니의 두 손 가득 접시가 들려 있었다. 집에 들어와 바삐 아이들 저녁상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옆 집 아주머니는 맛있는 말린 나물반찬이 가득한 접시를 내밀었다. 내가 많이 피곤해 보여서 아이들 반찬이라도 하라고 갖고 왔다고 하셨다. 그날, 난 정말 그 나물을 맛있게 먹었다. 맛있다는 내 표현이 한참 부족할 정도로 가슴 깊이 감사했던 고마움이었다.



그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데 말이다. 돌아가지 못해도 우리는 이웃을 위해 따뜻해질 수 있다.

우리의 가슴은 아직 1988년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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