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be

by MAMA


긴 추석 연휴 무얼 할까 하다가 막둥이가 강릉을 가고 싶다는 말에 급작스레 숙소를 알아보았다. 바다를 보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어 바다보다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산을 택했다. 그래서 목적지로 정한 곳이 ‘설악산’.


대청봉을 찍고 내려오는 것은 아무 장비도 준비도 없이 터무니없는 얘기였지만 설악산 등반 난이도 쉬움으로 표시되어 있는 코스로 울산바위나 비룡폭포를 다녀올 수는 있겠다 싶었다. 1시간 50분이면 기분 좋게 땀 내기 좋은 코스였다. 아이들의 투덜거림도 설악산 산기슭의 맑은 공기와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면 잦아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 출발 후, 남편이 제2 영동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 IC에 길게 늘어서 있는 많은 정체 차량을 기다리지 못하고 지나쳐 다른 길로 가고자 하는 때부터 일정도 마음도 꼬이기 시작했다.



서울 동쪽 끝자락 미사리 강변까지 국도로 갔는데 남편이 다리 진입로를 또 기다리지 못하고 우회를 했고 아주 작은 샛길로 들어서 두 시간 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갇혀있게 되었다. 길 옆 맛집들이 즐비했고, 배고픈 아이들은 간판을 보고 군침을 흘리면서 아우성을 쳤다. 식당으로 빠지더라도 다닥다닥 붙어 아주 조금씩이라도 전진하고자 하는 성난 차량 사이를 다시 진입하고자 하는 것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창 밖에는 초점 잃은 눈동자를 하고 바삐 걸음을 종종 대며 가게마다 들락날락하는 소변이 급한 운전자와 가족들이 보였다. 이 길이 상습 정체 구간인지 곳곳에 군밤장수며 옥수수 장수들이 있었다. 남편은 집에 다시 돌아가거나 밥이라도 먹고 오는 게 낫겠다며 솟아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는 듯했다. 아이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래도 이 길을 벗어나 다시 진입해 똑같은 정체구간에 있어야만 하는 손해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내 결정을 기다렸고, 나는 못 먹어도 고라며 전진을 밀어붙였다.



다리에 진입하자 이내 정체가 풀렸다. 변두리 어딘가 콩나물 국밥 집에서 허기를 채우고 나서 남편과 나는 자리를 바꾸었다. 속초까지 국도 운전이라니. 그래도 산이며 물이며 동네방네 구경을 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어느덧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룬 인제를 지나고 있었다. 인제는 황태덕장이 유명한 줄 알았는데 주객이 전도가 된 것인지 코스모스 하늘거림의 물결이 단연코 으뜸이었다.



오전 8시가 못돼서 출발한 것 같았는데 산 넘고 물 건너 오니 시간은 어느덧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투숙객이 많아 숙소에 체크인을 먼저 하지 않으면 숙소마저 1층 나무가 가리는 그늘 속 움막 같은 곳이 될 것 같아 도착하자마자 숙소부터 갔다. 1층 로비에 들어서 체크인하기 전 화장실을 갔는데 이런 글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 인생이란 더 잘하려고 하면 힘들어진다. 그냥 내버려 두면 뭐라도 되는 게 인생이다 “



갑자기 예약해서 싸든 비싸든 빈 방이 있는 게 기적 같았는데 일박에 십삼만 원짜리 마지막 방이 예약이 된 건 로또였다. 그래! 정말 로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싼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가성비로 잠만 자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한 곳을 예약했다.


1970년 생 덕선이가 수학여행 간 곳이 이 보다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낡고 오래된 단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더럽기는 말도 못 했고, 관리의 흔적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따위 상태로 투숙객을 받을 수 있을까 화를 내고 싶었다. 인덕션 사이사이 기름 묵은 때하며 바닥의 끈끈함과 언제 받았던 투숙객의 머리카락인지 이불 포도 바꾸지 않았고, 화장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말 잠만 자도 다행인 그런 곳이었다.


복도에는 오래된 카펫에 쿵쿵하게 베인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으나 직원들은 환기조차 하지 않았고, 심지어 1층 편의점도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물품 재고가 거의 없었다. 뭐 이런 귀신의 집 같은 곳이 있는지 이런 곳을 십 몇만 원을 받아 챙기는 못된 심리는 사기꾼 아니, 쓰레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 화장실에 붙어 있던 그 두 문장이 이 숙소 경영진의 경영철학인가 싶었다. 될 대로 되라고 이렇게 내버려 두었나?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틀이나 자야 했다. 아이들은 최대한 늦게 숙소에 들어와야 한다면서 온몸을 피곤하게 해서 이곳의 그 어떤 낙후됨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하여 여행 콘셉트가 ‘자학’이다. 자기 학대.



짐을 놔두고 당장 나왔다. 그곳에 1분도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일단, 속초 중앙통으로 가서 햄버거를 사 먹었다. 일단, 보이는 곳에 닥치는 대로 들어갔다. 근처에 이마트가 보여서 구경할 겸 들어갔는데 추석 전이라 인산인해. 우리도 분위기에 젖어 덩달아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샀다. 그리고 향한 곳은 중앙시장. 그곳 인파는 이마트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속초. 관광도시. 누가 속초 중앙시장이 다 죽었다 했냐 걸리기만 해 봐라. 이러다가 압사당하지나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온 시장통을 뒤덮는 닭강정 튀기는 기름냄새, 오징어순대 지지는 냄새에 막걸리 찐빵을 먹겠다고 줄을 몇 십 명은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원래 맛집 줄 서기를 선호하지 않아서 밟혀 죽을 것 같은 시장통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시장 통 입구. 아무도 줄 서지 않는 점포에서 포슬포슬한 감자빵을 쉽사리 사들고 동굴이나 다름없는 숙소에 들어왔다. 물티슈로 몇 차례 바닥을 닦고 나서야 이불을 펴고 잠이 들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



나는 한숨도 못 잤다. 잠이 왜 이렇게 안 오던지..

밤을 꼬박 새웠다.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손바닥만 한 거미와 설악산 기운을 받아 잘 자란 덩치 큰 나방들의 기습 방문에 아이들의 괴성이 시도 때도 없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새벽이 밝아 옴을 기다리니 베란다 통 창 가득한 설악산 능선은 그래도 장관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자학’ 캠프는 시작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먹고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정말 웬일인지. 어제 이마트에서 사놓은 상투과자와 귤, 빵등으로 탄수화물 폭탄을 뱃속에 터트린 후, 설악산으로 호기롭게 출발! 그런데...


으악!


어제 속초 중앙시장에서 본 인파가 설악산을 오려고 한 인파였나 보다. 숙소에서 4km 정도 되는 설악산 소공원 주차장이 1시간이나 걸린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이 만차인 듯했다. 우리는 차를 주차장이 한참 남은 숲길 옆에 세웠다. 거의 차를 버렸다고나 할까.



소공원 주차장까지 3km. 40분은 걸었다. 주차장 만차로 인해 길게 늘어선 차들을 보니 차를 일찍 버리고 걷기를 택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분 미리 걸어서 등산 전에 몸 풀었다 생각하니 말할 나위 없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 들어서 얼마 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은 대청봉과 비룡폭포, 케이블카 타러 가는 곳이었고, 오른쪽은 흔들바위, 울산바위 가는 길이었다. 그까짓 것. 두 시간 등반은 식은 죽 후루룩 마셔버리기지.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리고 습도가 높은 날씨 탓에 산기슭에 들어서니 피부로 느껴지는 날씨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흔들바위까지 약 1KM. 널따란 등산로로 흔들바위까지는 무리 없이 도착했다. 아이들이 이쯤 해서 됐다며 내려가자 할 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 이왕 온 김에 0.9KM 남았는데 울산바위를 찍어야지라며 앞장선 내 발걸음을 따라 다들 꾸역꾸역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998 계단이라 했나?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얼마나 좁고 가파르고 높다라고 험한지 이런 곳에 철제 계단을 이리도 누가 잘 설치를 해놨나 궁금하기도 했다. 올라가면서 천국을 몇 번이나 다녀온 것 같았다. 두 시간 등산을 얕잡아 보고 물 한 병 달랑 들고 온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배낭에 초코바라도 아니면 삶은 달걀이나 이온음료라도 챙겨 왔어야 했다.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 울산바위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거의 기진맥진. 이럴 수가. 안개가 자욱해서 아무것도보이지 않았다. 꼭대기에서 펼쳐질 절경이라도 기대했건만 정말 구름 속에 있었다. 휴!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요기할 거라도 있었으면 하산할 때 덜 피곤했을 텐데 급하게 물 한 모금 축이고 빗 속에 하산하려니 정신줄도 다리도 풀려 버렸다.



겨우 출발지점에 도착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건 40여분 또 걸어 차까지 가야만 한다는 암담한 현실이었다.

나는 말이지 관리가 엉망진창인 이름만 리조트인 숙소 화장실에 붙어 있는 두 문장에 허를 찔린 것 같았다. 그 두 문장을 읽고는 이 숙소 경영진의 태만과 고객들에 대한 기만에 대해 참을 수 없어 분노했지만, 돌아보니 인생이 정말 그러했다.



악착같이 오른 울산바위보다, 기를 쓰고 중앙시장 통 닭강정 집 앞에 줄을 서는 것보다, 빠른 길로 우회하려고 돌아섰던 선택보다, 얻어걸린 인제의 코스모스 길이 좋았고, 아무도 줄 서지 않았던 감자빵 집의 포슬거리는 감자빵 맛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고, 차를 버리고 터덜거리며 걸었던 설악산 입구까지의 보행이 설악산을 즐기기에 훨씬 나았다.



뭐지? 대체 인생이 뭐지?


답이 없다. 답이.

꼭대기까지 헉헉대고 갔는데 안개만 자욱한 그런 느낌들.


살면 살 수록 오리무중인데 내버려 두면 뭐라도 되는 게 인생인 것도 인정하기 싫지만 인생이란 질문의 오지선다형 답안 보기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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