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가을. 새벽 공기는 흠뻑 취하고 싶을 정도로 축축하다. 이슬이 내린 아스팔트 위로 일찍 일어 난 까치 두 마리가 양반걸음으로 4차선이 제 집인 양 종종 다닌다. 꼿꼿한 꼬리 깃털이 꽤 기품 있어 보이지만 두 녀석이 부부인 듯 아침부터 시끄럽다. 그 둘의 대화는 그다지 기품 있는 양반가보다는 상놈의 집 평범한 듯 소박함에 가까운 듯하다. 공원에 접어들면 매일 뵈는 셰퍼드와 코기의 잡종견 주인 할머니가 산책을 하고 있고, 어두운 축구장 한 켠에서 몸을 푸는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녹음을 자랑했던 나무들은 오색찬란했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어느새 중후한 빛으로 물이 들어가고 벌써 여느 잎들은 색이 바래기도 전에 떨어져 이슬에 젖어 녹았다. 안개 자욱한 저 너머 하늘은 해맞이를 준비하는지 보랏빛 핑크 빛 결국의 붉은빛으로 땅 위로부터 하늘까지 넘실대고 있다.
한적한 동네라 7시 전에는 신호등의 로직이 작동되지 않아 깜빡거리는 노란색 횡단불빛 앞에서 슬슬 몸을 풀고 뛰기 시작한다. 허름해진 운동화 바닥이 닳아진 듯 바닥에서 오는 충격이 정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서툰 목수가 연장을 탓한다고 운동을 못하는 게으름을 운동화 탓할 수 있을까. 몇 달을 눈을 떠서 무작정 뛰기 시작하니 가뜩이나 디딤이 센 발을 견디지 못하고 운동화 두 켤레가 걸레가 되었다.
뜀박질이라 부르기엔 느리고 그렇다고 걸음질이라고 부르기엔 빠른 그 어느 중간 지점에서 나 자신과 타협을 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저만치에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분 역시 매일 마주치는 러닝 크루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오늘도 열심히 달리시는군요'라며 가벼운 인사라도 해볼까 하지만 숨이 벌써 헐떡이시며 바삐 보이신다. 언제는 나를 보며 힘차게 '파이팅'이라 외치시는데 그날 왠지 동료애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버스 정류장을 지나 아주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되고 500미터 만치 보이는 굴다리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이다. 오르막 길 오른쪽은 논두렁 밭두렁이다. 누런 벼도 익어가고 게으른 농부가 따지 않은 장대만큼 커진 머위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느 부유한 사장님은 자기만의 놀이터를 만들어 놓았는데 미니 골프장과 가건물에 고구마도 구워 먹을 수 있는 연통이 보이고 그 옆에는 적잖은 작물을 재배하는 밭이 있다. 꽤 근사하다. 남편은 산책을 오고 가면서 그 부유한 사장님의 놀이터를 부러워했다.
굴다리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내리막길의 오른쪽 오솔길로 들어서는 샛길이 있다. 큰 아이 중학교의 뒷 길인데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학교는 고요하기만 하다. 며칠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샛길로 들어서자마자 누런 고양이를 만났다. 저만치에서 나를 맞닥뜨린 길양이는 피할 줄을 모르고 어슬렁어슬렁 마치 자기가 호랑이인양 먹잇감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회사에서 고양이 엄마의 조련으로 고양이가 익숙해질 줄 알았건만 나와 양이의 단독 샷은 아직 무섭다. 냅다 겁을 집어 먹고 뒷걸음쳐 날 살려라 오솔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오솔길을 내려오면 중학교 앞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젠장 더 빨리 뛰어야 7시 안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중학교 교문 앞을 지나 중학교 옆 공원으로 들어서면 굽이 굽이 여러 갈림길에 감나무가 즐비한다. 감이 제법 주황빛으로 익어가고 있는 무렵, 때 이른 산책을 나온 객들은 곁 눈치를 보면서 익은 감을 따간다. 나야 호랑이 기세로 다가 온 길양이에 쫓겨 정신없이 뜀박질하느라 객들의 감 서리에 관심이 없다만 저들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난 정말 관심이 없는데 말이다.
땀 방울이 등줄기로 날 때마다 식은 이슬들이 날아가듯 증발해 버리고 다시 축축한 가을 낯빛이 피부에 닿았다 또 사라졌다. 지난 따가운 여름 새벽에 새끼 뱀과 마주했던 길에 들어섰다. 머위를 자르지도 않았던 농부의 밭과는 달리 봄에는 단호박이, 가을에는 겨울 한철을 나게 해 줄 단단한 무들의 청들이 총총히 자라고 있는 청록의 밭은 영롱한 부지런한 결에 가히 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속속들이 빈틈이 없는 밭 사이에서 까치들은 아침 식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맛난 지렁이라도 물어 제 새끼한테 부지런히 날아가는 주둥이는 기특하기도 하고 복스럽기까지도 하다. 특히, 까치들 사이에 비둘기들이 눈에 띄는데 새우깡과 사람들의 음식 쓰레기를 뒤지는 도심의 비만스러운 비둘기에 비하면 걔네들은 날렵하고 또렷한 눈빛을 갖고 있다.
“하---”
숨을 내뱉으며 뒷심을 내본다. 이 길에서 만나는 마지막 길동무는 ‘노래하는 소녀’. 굽슬거리는 단발머리에 통이 큰 카고바지. 밑단이 펑퍼짐한 큼지막한 티셔츠에 백팩을 메고 늘 같은 시간 노래를 부르며 걷는 소녀를 만난다. 어느 날은 그녀를 앞지르기도 하고, 그녀의 노래 가락이 흥에 겨운 날은 뒤에 따라가기도 한다. 그녀를 만날 때면 상상을 한다. 혹시 엔터테인먼트 회사 연습생일까 아니면 홍대 근처 버스킹하는 아이일까.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뒷모습을 보고 지나쳐 냅다 뛰기에 바빴으니까 말이다. 사실, 얼굴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기가 멋쩍었다. 그녀의 뒷모습마저도 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뜀박질의 배경이려니 하니 그저 뒷모습 그대로 두어야겠다.
6:43 AM.
4.64KM.
5694보.
퇴근 시에 우연히 본 워치 기록
5:30 PM.
9.5KM.
13,114보.
오늘도 사랑한 열심이가 넘친 하루. 정말 수고했다.
나는 매일 행복한 만보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