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없이 환불

by MAMA

“회수 없이 환불처리 되었습니다.”


얼마 전, 사과를 한 박스 주문했다. 바야흐로 아삭아삭한 사과가 참으로 맛난 계절이다. 다행히도 올해는 사과가 작황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양껏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군침이 돌았다.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넉넉하지 않은 유학생 형편에 이것저것 배불리 못 먹어도 예쁜 사과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 Safe Way에서 비싼 honey crispy만 사 먹었었다. 큼지막한 크기에 빛깔이 좋아 빨갛게 반짝이는 껍질째로 베어 물면 과즙이 줄줄 흘렀다. 새콤달콤 아삭거리다 못해 바삭거릴 정도의 식감, 노린 빛의 과육 사이로 촘촘히 박힌 영롱한 사과 꿀. 한국에서도 감홍사과가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맛이라고 하는데 그때의 그 사과 맛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튼 올해는 가을 겨울 내 냉장고에 사과를 가득 쟁여두고 먹을 생각을 하면서 신이 나 온라인 쇼핑몰을 뒤졌다. 예년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박스째로 주문을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2주째가 되었나 보다. 사과를 주문했었는지도 잊어버렸을 때, 업무 중에 문자를 받았다. '해당 상품이 품절되어 환불처리 되었다'고 말이다. 김이 샜다. 많이 기다렸는데 압력밥솥 증기 빠지듯 김이 새 버렸다. 다른 데서 주문하면 되겠지 했지만 귀찮아졌다. 별거 아닌 일이 기대가 되었고 그까짓 것이 빨리 문 앞에 도착해서 향긋한 사과 냄새에 취해 냉장고를 가득 채웠어야 했는데 갑자기 싫어졌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쩌다가 새 옷을 사려고 아이쇼핑을 한 참 하다가 마음을 먹고 주문한 옷이 품절이 돼버리면 그 의욕조차 허무해질 때가 있다. 그 열심과 노력을 또 쏟기 싫어버림.


그런데 집에 갔을 때, 문 앞에 사과 한 박스가 있었다. 품절로 환불처리 되었다고 분명히 문자를 받았는데 말이다. 다시금 문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회수 없이 환불처리’


가만히 그 박스를 보아하니 내가 주문한 상품은 아니었고, 품질이 제일 떨어지는 주스용 사과였다.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품절로 취소가 되었으니 미안한 마음에 주스 용이라도 한 박스 보내 상한 고객의 마음에 보상을 하려던 것 같았다. 상자를 열어 보니 말 그대로 흠과보다도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흠이 아주 많은 가련한 녀석들로 가득했다. 개수도 왜 그렇게 많은지 거의 50개나 되는 아이 주먹만큼 작고 점박이 멍투성이 녀석들을 나름대로 선별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먹을 만한 단단한 녀석들이 삼분의 일은 되었다. 나머지는 도려 내야 하는 부분이 꽤나 많고 많이 물러서 주스용으로도 안 될 지경이었다.


“누가 이런 걸 보냈대. 우리 엄마 고민스럽게.”


사과 한 박스와 한참을 씨름하는 걸 보더니 큰 딸이 웃으면서 한마디를 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차라리 환불처리만 해주었으면 이토록 고민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갱년기가 시작되려는지 불쑥 짜증이 한 바가지 올라오려는데 참고, 다시 선별 작업을 했다.


“이것들은 도저히 안 되겠다. 잼을 만들어야겠어.”


사과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지기 전에 껍질을 벗겨 먹을 수 있도록 썰어 놓을 수도 없는 법. 잼을 만들기로 결심을 했다. 일단, 사과를 씻어 껍질째 깍둑썰기로 썰어 놓았다. 무르거나 과심이 썩어 버린 것이 반은 되었다. 갈변이 되기 전에 설탕을 한 바가지 넣어 통에 담아 두었다. 내일은 엄마에게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서 연차를 내어 시간도 많은데 잼을 만들기에 딱 좋은 날이다 싶었다. 교회에서 분기별로 전도상과 오랫동안 성실히 재직에 임한 분들에게 상을 주는데 30년 근속상을 엄마가 받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작은 교회인데 이제는 그때의 따뜻함이 그리운 대형이 아니라 초대형 교회가 되었다. 교인들이 몇 천명 가량 모이는 날에 우리 엄마의 수상이라 손꼽히는 교회 행사에 연차까지 내고야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분주했다. 오랜만에 특별한 타지로의 나들이 없는 연차였다. 그런데 늦잠을 자지도 못했다. 남편은 여전히 새벽 출근을 했고, 빨래를 돌렸고,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청소기를 돌렸으며, 아침을 준비했고, 심지어 아이들은 엄마가 학교에 바래다준다면서 늑장을 부렸다. 그래도 똥강아지들의 늑장에 화가 나지 않은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집에 와 나갈 채비를 하고 화원에 들러 꽃다발을 샀다. 화원 사장님께 ‘저희 엄마가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제발 보라색 포장은 피해 주세요’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보라색 포장을 겹겹이 꽃을 말아주셨다. 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꽃은 아름다웠으니까 그리고 가을 날씨가 좋았으니까..


여하튼 평화롭고, 화가 났고, 엄마의 주름과 오랜 신앙생활의 깊이로 인한 존경심에 울컥한 오전이 후다닥 지났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잼을 만들 생각뿐이었다. 어젯밤 설탕을 부어 놓았던 사과는 다행히 갈변되지 않았다.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사과를 믹서기에 갈았다. 그러고 나서 약불에 설탕을 더 넣어 저어 주면서 끓이기 시작했다. 냉동실에 찾아보니 레몬즙이 있었다. 물에 타 먹으려고 레몬을 갈아 큐브 형태로 얼려 놓은 것들이 있어 덩어리 서 너 개를 끓고 있는 사과에 넣었다.


한참을 저었다. 설탕이 국물이 다 졸아 수분이 없어질 때까지 젓고 또 저었다. 점점 연갈색의 젤리 형태로 졸아 들고 있었다. 온 집에 달달한 향이 가득했다. 잼이 끓어 튈 때마다 주방은 끈끈하고 설탕의 녹지 않음으로 인해 저벅거렸다. 평상시 같으면 그 저벅거림이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을 텐데 희한하게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꾸덕해지고 있는 번질거리는 잼을 보고 있자니 계속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집 전체에 퍼지는 달큰 시큰한 향기때문이었나. 나는 비실비실 쪼개고 있었다. 엄마의 기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아이들의 등굣길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선선한 가을날 햇볕이 쏟아지는 낮에 사과향이 가득한 집에서 잼을 만들고 있는 여유라니. 사과 양이 많아 약불에 천천히 졸여야 해서 한 시간가량 서 있었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투명한 젤리의 알갱이가 알알이 박힌 연갈색의 잼이 완성되었다. 한 입 맛을 보니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다 물러터진 사과가 나에게 이런 행복을 주다니. 회수 없이 환불 처리해주신 사장님께 감사했다. 가을이 가을 다웠고 연차가 연차다웠고 사과가 사과다웠던 하루. 잼 한 통을 다 먹을 때까지 계륵이었던 사과가 주는 반전의 묘미에 침샘이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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