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합리함의 합리적 활용
루키 씨는 내일 쉬도록 해.
내일 금요일인데, 쉬라고? 왜??
6개월의 프로베이션(수습 기간)이 있는 신입에게 쉬라는 말은 어떤 말보다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슈퍼바이저가 이유를 설명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번역되지 않는다.
입사 첫 주 금요일,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게 도무지 가시방석이다. 동료들은 모두 일하고 있는 평일에 갓 입사한 신입이 집에 있으려니 이래도 되나 싶고, 조직에서 소외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행여 프로베이션을 통과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마저 스며든다. 2주마다 롱위켄(long weekend)이다. 월요일에 공휴일이 잡히기라도 하면—캐나다는 근로자의 삶의 질을 고려해 날짜 대신 월요일로 지정한 공휴일이 많다—롱위켄은 금요일부터 월요일로 더욱 길어진다. 플렉스 데이지만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 없던 루키의 마음은 플렉스 하지 않다.
8시 13분, 내 업무가 시작된다. '출근 시간 = 9시'라는 통념을 깨고 주정부 입사 전 근무했던 캐내디언 회사는 7시 30분 출근이었다. 느릿하게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느긋하게 움직이고 싶은 한겨울,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 검푸른 하늘을 보며 하이웨이를 달렸다. 아침잠이 많아 새벽 출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퇴근 역시 일러서 긴 저녁 시간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덕분에 늘 자정을 넘기던 취침 시간이 10시로 당겨졌다. 받아들이고 나니 점점 괜찮아지던 터라 8시 13분 출근이 크게 부담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캐나다는 주당 30시간에서 40시간 근무를 풀타임으로 본다. 급여 주기는 월급제가 일반적인 한국과 달리 weekly(주급), bi-weekly(격주), semi-monthly(한 달에 두 번), monthly(월급)로 다양하다.
BC 주정부는 2주 간격으로 급여를 지급한다. 근무시간은 1주에 35시간, 2주간 70시간이다. 열흘 동안 하루 7시간 일을 하는 것이다. 80시간을 정규 근무로 하는 연방정부에 비해 시간이 짧은 건 아쉬운 부분이다. 근무시간이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커미션(성과급)이 적용되는 특정 직업이 아닌 이상 캐나다에서 고정된 급여를 받는 일은 드물다. 정규 근무시간 기준으로 월 소득 얼마, 연 소득 얼마 하는 수치는 나오지만, 대부분 고용이 시간제 형태를 띠고 있다. 오버타임(추가 근무) 수당, 실업급여 등도 근무시간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시간당 임금이 같아도 근무시간이 짧은 우리는 연방정부에 비해 소득이 적다.
내가 속한 장애소득지원 로컬오피스는 9시부터 4시까지 민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을 위해 문을 닫는다. 직원들의 정규 근무시간은 8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며, 점심 1시간을 제하면 7시간이 된다. 캐나다는 연속 5시간 근무 시 30분의 '밀(meal: 식사) 브레이크'를 제공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무급'이다. 대부분 도시락을 싸 오기 때문에 30분이면 점심을 먹기에 충분하지만, 조직의 특성상 근무 중 한 시간의 강제 무급 휴식을 갖는 불합리한 구조다. 불필요한 30분의 추가 휴식 대신 30분 일찍 퇴근하고 싶은 게 모두의 진심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억울한 30분의 무급 휴식을 '저장(bank)'할 수 있는 플렉스가 있다. 하루 30분씩 9일간 저장하면 총 4시간 30분의 적금이 생긴다. 여기에 2시간 30분을 추가하면 하루 근무시간인 7시간이 나온다. 2시간 30분은 150분, 150분을 9일로 나누면 16.6666....분이다. 8시 30분 공식 근무시작 시간보다 17분 빠른 8시 13분에 출근해 9일간 2시간 30분을 만든다. 즉, 10일간의 근무를 9일에 나눠서 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적립한 7시간으로 하루의 플렉스 데이가 생긴다.
a. 10일 × 7시간 = 정규근무 70시간
b. 9일 × 7시간 = 63시간 실제근무
c. 9일 × 30분 무급휴식 대신 근무 = 4시간 30분 적립
d. 9일 × 17분 일찍 출근해 근무 = 2시간 30분 적립
<a = b + c + d>
원치 않게 무급 점심시간을 30분 더 써야 하는 불합리함이 유급의 근무시간으로 합리적으로 바뀌며, 7시간 대신 7시간 47분을 일하고 하루의 평일 휴가를 갖는다. 물론 원하지 않을 경우 7시간만 일하면 된다. 하지만 달콤한 평일의 휴식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오히려 매주 플렉스 데이를 가질 수 있다면 하루 8시간 34분 근무도 환영하는 분위기다. 일부 포지션은 실제 주마다 플렉스 데이를 갖는다.
그런데 잠깐. 16.6666....분인데 17분 일찍 출근한다고? 0.3333....분 차이가 나는데? BC 주정부는 공정성(fairness)을 표방한다. 직원이 정부의 시간을 남용하면 안 되는 것처럼 정부 역시 직원의 시간을 남용하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는 초 단위의 나머지 시간을 모아 두 번에 한 번씩 급여가 조금 더 들어온다. 직원의 근무시간은, 시스템이 아닌 이상, 측정이 용이한 분 단위로 존중받는다. 8시 10분에 출근하면 점심을 3분 더 쓸 수 있다.
플렉스 데이의 정식 명칭은 'EDO(Earned day off)'다. 땡땡이 아니고 정당하게 근무시간을 채우고 얻는 주중 휴일이다. 하지만 그때그때 쉬고 싶은 날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직원들 각자 2주에 하루, 고정된 요일이 있다. 요일은 인력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 오피스의 상황에 따라 분산한다. 같은 포지션에 직원이 여럿 있을 경우, 입사순서에 따라 요일을 우선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요일은 당연히 월요일과 금요일이다. 더러 중간인 수요일을 선호하는 직원도 있다. 화요일을 배정받은 직원은 월요일에 공휴일이 끼면 나흘간의 롱위켄을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한 번이면 충분한 월요병을 두 번 겪는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선임이 자리를 옮기거나 퇴사해 비는 요일이 생기면 서열에 따라 그 요일을 물려받을 수 있다.
EDO를 앞두고 몸이 좋지 않은 직원이 있거나 베너핏 주간이 다가오면 은근히 긴장되기도 한다. 혹시 쟤가 아파서 못 나오거나 인력이 부족하면 내가 불려 나오지는 않을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하려던 계획을 바꿔야 하나? 차라리 속 편하게 출근하겠다고 말할까? 모두 불필요한 걱정이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과잉 충성이다. EDO 중인 직원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다. 그 대상이 슈퍼바이저나 점장이고, 사무실에 어떤 긴박한 일이 생겨도 연락을 하는 일은 없다. 옆 동네에서 출근한 직원을 빌려서라도 오피스는 운영되고, 경영진의 역할을 대신할 커버리지 역시 상시 마련되어 있다.
몇 년 전에 퇴직 어르신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수십 년 전에 주정부에 근무했었는데 아직도 EDO가 있냐고 물으며 참 좋은 제도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EDO는 BC 주정부의 유익한 문화임은 분명하다. 주중에 정기적으로 쉬는 날을 갖는 것이 주는 혜택이 크다. 주말에 하기 어려운 병원 예약이나 은행 업무를 보기도 하고, 영사관 업무를 볼 수도 있고, 늘 북적거려 가기 어려운 맛집을 한가한 시간에 갈 수도 있고, 방해 없이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도 좋다. 이제는 어색하거나 가시방석이 아닌 기다려지는 플렉스 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