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우리 조상들의 처절하고도 영리한 생존 전략
어릴 때부터 익숙한 고사리
제주살이 초기 1종의 아름다운 추억
독의 위험성과 맛 사이의 시소게임
제주의 어느 공동묘지에 물매화와 고사리가 함께 살고 있다. 물매화 꽃탐사를 갔다가 양치식물의 1종 고사리(braken)를 배웠다. 잎의 모습과 잎의 가장자리가 뒤로 말린 위포막에 포자낭을 확인하며 오리지널 고사리임을 알았다. 물매화와 고사리를 한컷에 넣는 사진을 담으며 그날의 추억을 갈피에 넣었다
고사리에 대한 추억은 내 삶을 지탱해 온 자양분이다. 제사상에 오르던 정갈한 나물, 어머니가 산에서 뜯어온 고사리 새순의 아기 손 같은 생명력은 늘 신비로웠다. 아들이 가락시장에서 밤새 일하고 아침에 가져온 고사리는 세상 무엇보다 달았고, 제주살이 중 만난 양치식물의 세계는 내 삶의 빈칸을 채워주었다. 지금은 통영에서 아내의 지인이 보내준 고사리를 맛보며 그 인연의 향기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고사리를 대하는 동서양의 시선은 극명히 갈린다. 서양에서 고사리는 그저 제거해야 할 위험한 잡초일 뿐이다. 소의 방광암을 유발하는 독성(프타킬로사이드)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풍요로운 들판과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들의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고사리는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골칫덩이였겠지만, 우리에게 고사리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다. 논밭이 적은 척박한 땅에서 혹독한 사계를 견뎌야 했던 민초들에게 산나물은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였다. 새순의 독성을 없애고 나물로 승화시킨 것은 우리 조상들의 처절하고도 영리한 생존 전략이었다. 고사리를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 부른 것은 단순히 영양 때문이 아니라, 고기 한 점이 간절했던 그 절박한 소망이 만든 말일 것이다. 이 끈질긴 생존의 유전자가 오늘날 우리를 고사리에 적응된 강인한 체질로 만들었으리라.
고사리의 독을 다스리는 법(法)은 이제 우리의 상식이 되었다. 벌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내뿜는 식물의 방어 기제를 우리는 '법제(法製)'라는 지혜로 극복했다. 암을 유발하는 프타킬로사이드와 각기병을 유발하는 티아미나제는 수용성 독소다. 삶고, 찬물에 반나절 이상 담그고, 물을 여러 번 갈아주는 정성을 통해 독은 씻겨 나간다. 이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부둥켜안고 공생해야 할 동반자로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고사리'라는 이름에 담긴 숭고한 철학을 되짚어본다. 옛 문헌에서 '고사리'를 '고살이'로 표기한 것은 '높은 곳(高)에 사는(살이) 식물'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제주 남원읍 하례2리에는 '고살리'라 불리는 특별한 샘이 있다. 효돈천의 원시적 수림 속에 자리 잡은 이 샘터는 한라산 남쪽의 첫 마을이자, 바다와 멀리 떨어진 험준한 고지대다. 예부터 이 높은 곳에 터를 잡고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고사리는 척박한 땅이 내어준 첫 번째 식량이자 귀한 생명줄이었을 것이다. 결국 고사리는 척박한 산속에서 피어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삶, 그 자체인 셈이다.
우리는 지금 저마다의 삶 속에서 어떤 독(毒)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 독성을 모른 채 살아가고, 누군가는 겁먹어 뒷걸음질 치고, 누군가는 그저 제거해야 할 잡초라며 외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척박한 산비탈에서 '산에서 나는 소고기'를 발견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을 다스려 맛으로 승화시키는 끈질긴 마음일 것이다.
거창하고 풍요로운 곳이 아닌 곳에서 살아도 좋다. 지금 내 발밑에 돋아난 작은 초록의 생명에 눈을 맞추고 그 안에서 공생의 길을 찾아내는 정성이 모일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고살이'처럼 정제된 가치를 품게 될 것이다. 오늘 당신의 식탁 위에 오른 나물 한 점이 전하는 메세지에서 행복의 자양분이 찾아보시길 바란다.
고사리 장마
벚꽃 떨구는 안개비에
여행자의 애간장은 하얗게 타들어가도
중산간 굽이진 길 위론
비릿한 흙내음이 차오릅니다
이름 모를 초록들이 모두 ‘fern’으로 불릴 때
제주의 봄은 오직 ‘고사리’ 하나로 일어납니다
변덕스러운 빗줄기를 수액 삼아
말아 쥔 주먹을 쑤욱, 기지개 켜는 시간
오름과 묘지 사이, 길 잃은 발길들이
둘씩 짝을 지어 몸을 낮추면
땅밑 1미터 깊이로 뻗은 질긴 인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군락을 이룹니다
세상의 양지 바른 경사면마다
왕성하게 번지는 저 억척스러운 생애
꺾여도 다시 솟는 연둣빛 화두가
지금 제주 전역에 빽빽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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