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바람놀이 쉼표 되어 칠십 고개 넘는다
올겨울과 봄, 통영에서의 시간은 '방콕' 여행의 즐거움과 고뇌가 뒤섞인 이중주였다. 이성은 양치식물의 깊은 늪에 빠져 넋두리를 늘어놓는데, 감성은 봄바람에 휘청이며 자꾸만 밖으로 널뛰기를 한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큰맘 먹고 나간 봄나들이에서 마주한 건 달랑 '꿩의바람꽃' 한 송이뿐. 감질나게 핀 그 꽃 한 장을 블로그에 올리며 투정을 부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건 제주의 약올림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어 제주의 추억으로 내달리니, 현실의 그리움이 유쾌한 스토리로 변한다. 자, 이제 칠십 고개의 쉼표가 될 '꿩고비'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제주 시절, 꿩고비를 찾지 못한 아쉬움이 '꿩알'이라도 찾는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변했다. 꿩 둥지 속 탐스러운 알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 눈을 부라리며 초원을 헤맸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낙상 사고로 다리에 철심을 박은 채 절뚝거리며 오름을 올랐다. 오직 제주 제1의 맛, '섬오갈피' 새순을 따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런데 며칠 뒤 내 발자국을 따라간 이웃이 툭 던진 한마디가 내 심장을 강타했다. "아이고, 꿩알을 아주 짓밟고 가셨던데요?"
뭐라고? 그렇게 찾아 헤매던 꿩알을 내 발로 뭉개버렸다고? 흥! 보여주기 싫으니까 나를 아주 놀라게 했구나. 황당함과 허탈함이 뒤섞여 머릿속에 '꿩의 반항'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래서였다. 통영에서 꿩의바람꽃을 보며 괜히 꿩을 놀리고 싶었던 심술의 정체는! 촬영한 지 보름이나 지나서야 슬쩍 세상 구경 시켜주니, 꿩의바람꽃이 "친구들 다 가고 없는데 이제야 꺼내 주냐"며 한숨짓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겠니, 꿩아! 이건 제주의 약올림에 대한 나의 정당한 복수란다.
사실 꿩고비는 꽃처럼 솟아오른 포자엽 덕분에 꽃꽂이 재료로 불려 다니는 신세였다. 10년 전 강원도에서 처음 보고, 최근 영남알프스에서 다시 만났지만, 제주에서 못 본 녀석이라 내 '양치식물 이야기' 목록에선 아예 빼놓았었다. 그런데 요놈의 봄바람이 문제일까. 다시 꿩고비를 관객석에 앉혀두고 꿩의바람꽃과 질투 섞인 바람놀이를 즐기게 될 줄이야. 누군가 묻는다. "세상천지 꽃구경 안 가고 고사리에 미쳤소?" 그러면 나는 꿩고비의 갈색 포자처럼 묵직하고 짭짤한 웃음을 지어 보이리라. 이것이 내 노년의 가장 확실한 위로이자 재미니까.
관객석의 꿩고비
제주 들녘 누비어도 꿩알 하나 못 보고서
알알이 맺힌 설움 바람꽃에 되돌린다
통영 땅 하얀 꽃잎아 내 농담을 들어라
바람꽃 한숨 소리 친구 없어 서럽다니
제주의 약올림이 이리로 돌아왔나
외로운 꿩 한 마리가 노랑 옆에 섰구나
노오란 복수초야 네 복을 나눠주렴
친구를 찾는구나 떼쓰는 바람꽃에
봄날의 이 랑데뷰의 풍경이 눈부시다
강원도 십 년 세월 알프스 험한 길에
꿩알 대신 건져 올린 갈색 빛 저 꿩고비
꽃꽂이 재료라 한들 내 눈에는 꽃이다
포자엽 고개 들어 이 무대 어떠느냐
나 아니면 네 녀석이 출연이나 했겠느냐
갈색 빛 묵직한 웃음, 내 글 속에 살아라
꽃구경 잊었느냐 세상이 물어오면
고사리 그늘 속에 참 재미가 있다 하리
이것이 쉼표가 되어 칠십 고개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