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기록되지 못한 전설을 향한 헌사
제주 땅 바람 끝에 구전(口傳)으로 듣던 소식
통영 땅 화원에서 실물(實物)로 마주하니
천년을 기다려온 듯 용비늘 그 품 깊네
억겁을 견뎌내어 용의 비늘 돋았는가
중축(中軸)의 묵직한 마디 관절처럼 부풀고
푸른 등 능각(稜角)을 세워 정글 맥박 깨우네
전설이 숨 쉬던 시절의 낭만은 어디로 가고, 현실의 팍팍함만이 감도는 디카의 시대다. 도처에 AI의 풍경이 넘실대는 요즘,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원시적인 생명력을 지닌 '용비늘고사리'를 떠올린다. 제주 시절, 바람결에 실려 온 전설 같은 구전으로만 접했던 그 이름을 통영의 어느 화원에서 운명처럼 마주했다. "앗! 용비늘고사리잖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감탄사.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경이롭기만 한데, 관광객들은 그저 흔한 열대 식물인 양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고사리사랑' 카페의 사진으로만 익히며 상상력을 키웠던 제주 시절을 지나, 통영의 공기 속에서 마주한 그 시원한 몸매와 이국적인 풍모는 내게 신비 그 자체였다. 아내에게 인증샷을 부탁하며 그 곁을 떠나지 못했던 나의 시간은, 다른 이들이 화려한 꽃에 빠져 있던 시간보다 훨씬 뜨겁고 감동적이란 자평을 남기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잔상이 가시지 않아 제주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년 전 그가 직접 보았다는 제주 용비늘고사리의 감회를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보목동에 무려 3미터에 달하는 거구가 실존한다는 전언. 나는 제주 여행을 앞두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거구를 볼 기회를 만들어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인연의 끈은 팽팽하게 당겨지지 않았다. 제주에 도착해 확인한 소식은 보목동 집주인이 마침 중국 여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3미터의 전설을 눈앞에 두고도 마주하지 못한 안타까움은 식물과 인간 사이에도 엄연한 '때'가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비 내리는 날, 나는 아쉬움을 머금고 하우스 농원을 찾아 용비늘고사리의 자취를 다시금 추적했다. 제지기오름과 월라봉의 낮은 곳, 그리고 선돌의 높은 곳. 고도에 따라 서로 다른 두 종의 용비늘고사리가 살았다는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식물학회 관계자에게 제보했고, 처음 보는 고사리라는 답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도감에 등재되지 않았으니 학명 등록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토록 당당한 풍채의 대형 고사리가 어떻게 제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단 한 포기라도 실재한다면 그것은 학명 이전에 '제주 자생의 기록'으로 남아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는 양치식물 전문가조차 구술 전언이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일축하며 학명 등록 기록의 부재만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구술자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보았다. 그것은 결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확신이었다.
나는 어쩌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옛날이야기를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초일엽처럼 멸종의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아예 존재의 기록조차 얻지 못한 용비늘고사리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를 휩싼다. 자생종으로서의 이름표 하나 얻지 못한 채, 한라산 어느 오름의 돌 틈에서 숨죽여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자생 기록조차 찾지 못한 고사리에 건네는 나의 작은 위로다. 용비늘고사리, 그 이름처럼 거친 대지를 뚫고 벌떡 솟구쳐 올라 세상 앞에 당당히 제 이름을 증명할 미래의 어느 날을 간절히 그려본다.
용의 비늘, 정글의 맥박
— 용비늘고사리(Angiopteris lygodiifolia)
제주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작은 오름에
북방의 한계를 지키는 초록 파수꾼이 살았단다
열대의 뜨거운 피를 수혈받은 정글의 후예
이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것은
줄기 끝에 뭉쳐 앉은 단단한 침묵
기부(基部)마다 겹겹이 쌓인 비늘의 덩어리다
세월이 화석처럼 굳어 용의 가죽이 된 탁엽(stipule)
그 아래 웅크린 용의 발톱을 본 적 있는가
외국서 건너온 수많은 것들, 매끈한 옷을 입었어도
오직 우리 토종의 비늘에만 새겨졌다는 정교한 무늬
그 깊은 결 하나하나 렌즈에 담고 싶었다
길게 뻗은 우축(羽軸) 위로
공룡의 등처럼 솟아오른 푸른 능각(稜角)
중심부에 맺혀 관절처럼 묵직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
그것은 바람을 견디려 스스로 힘을 모은 지혜인가
두 번을 갈라져 뻗어 나간 우상복엽(羽狀複葉)의 날개 위로
윤슬보다 깊은 광택이 흐르고
뒷면 가장자리, 맥 위에 나란히 정렬된 타원형의 점들
포자낭의 행렬은 내일을 향해 쏘아 올릴 초록의 복선이다
제주 보목동에 그 후예일지 모르는 고사리가 있단다
삼 미터의 거구, 그 몸뚱이 가득 돋아난 비늘이
우리의 무늬를 간직한 토종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비록 오늘, 그 거구의 용비늘고사리는 직접 보지 못했어도
내 마음속엔 이미 거대한 비늘이 돋아나
다음 제주의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