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Indigo)의 시억(詩憶) / 파초일엽

(73화) 멸종에 대항하는 기록

by 로데우스

삶은 생존의 몸부림

욕심은 멸종을 낳고

사랑은 추억을 보듬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4969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2ghRobS6UTN2dgEUYIujMRmE2q0%3D 피눈물 맺혔던 서귀포의 시간 (2023-01-27)



제주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에서 고근산으로 이어지는 그 길 위에는 나의 제주살이 6년의 발자국이 무수히 새겨져 있다. 월드컵경기장 트랙 위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에 맞서며 재활에 매진하던 시절, 거울 속 나의 얼굴에는 깊은 고통과 회한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년의 눈동자만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끈기 하나로 젖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무심코 길가 화단에서 눈보라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양치식물, 파초일엽이 내 망막에 들어왔다.

파초일엽은 본래 동아시아의 온대 지방이 고향이지만, 제주 섶섬은 이 식물이 자생할 수 있는 북방한계선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은 그 아름다움을 가만두지 않았고, 결국 '자생지 멸종'이라는 서글픈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다행히 제지기마을 주민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파초일엽 중 가장 닮은 것들을 다시 섶섬에 이주시켰고, 이제는 제주의 곳곳에서 그 푸른 잎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img.jpg?credential=yqXZFxpELC7KVnFOS48ylbz2pIh7yKj8&expires=1774969199&allow_ip=&allow_referer=&signature=THE%2FHo7LwKp%2Bb4TTcGVfZx0zlWc%3D 파초일엽 (2023-01-27)



문득 시인 이육사의 '파초'를 떠올린다. 그는 호화로운 남국의 계절을 잃어버린 파초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파초(芭蕉) 너의 푸른 옷깃을 들어 이닷타는 입술을 축여주렴"이라고 노래했다. 무지개를 밟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던 그의 시어는, 제주에서 파초일엽을 처음 만난 뒤 낙상 사고의 아픔을 겪으며 통영에서도 재활 중인 나의 머릿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제주의 기억은 이제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그 기억의 바다에서 나는 낚싯대를 처음 쥐어본 초보 낚시꾼처럼 서툴게 추억을 건져 올린다. 읽고, 검색하고, 고뇌하며... 처절한 열정을 무기 삼아 파초일엽을 다시 생각한다. 수원 서호에서 멸종된 서호납줄갱이의 속명 'rhodeus'를 나의 닉네임으로 삼은 것도, 고성의 공룡 발자국을 보며 먼 기억과 가까운 기억 사이의 역설을 고민하는 것도, 결국 망각이라는 이름의 망령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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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한 저녁, 삼겹살의 고소함과 매실주의 달큰함이 이중주를 이루던 행복한 대화 끝에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눈을 감으니 '멸종'이라는 단어가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다가왔다. 그것은 자연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도 소멸되는 과정이라는 공포였다. 나는 이 몽롱한 정신의 끝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싶었다. 옷도 입지 않은 태초의 상태에서, 서늘한 기운이 몸을 덮쳐 정신이 맑아지도록 나는 내 온몸에 남색(Indigo)의 옷을 입히고 또 입혔다.

이 글은 멸종에 대항하는 기록이자, 잊히지 않으려는 나의 생생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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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일엽(芭蕉一葉)
— 남색(Indigo)의 시억(詩憶)

멸종이라 쓰고 망각이라 읽는다.
수원 서호의 물결 아래 은빛 비늘을 파닥이던
서호납줄갱이는 멸종이란 이름으로 잊혀졌다

고성의 공룡은 거대한 발자국으로 박제되어
아이들의 웃음 속에 화려한 추억으로 환생하건만
나의 작은 물고기는 나 말고 그 누가 기억해 줄까

먼 기억은 공룡처럼 깨어나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는데
가까운 기억은 서호납줄갱이처럼 소리 없이 휘발된다
이것이 노인의 망령이라 불리는 서글픈 역설인가

섶섬의 바위틈, 파초일엽이 멸종된 그 자리에
주민들이 애지중지 키우던 '가족'을 다시 심었듯이
서호납줄갱이는 나의 닉(rhodeus) 수조에서 헤엄친다

아내와 나눈 최고의 삼겹살, 그 달큰한 매실주 몇 잔에
머릿속은 기분 좋게 몽롱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욕실의 뜨거운 물줄기는 세월을 견딘 나의 노체(老體)를 적신다

방금 씻어낸 오늘의 기억조차 멸종처럼 위태롭기에
나는 오늘 이 몽롱한 정신의 끝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아
남색(Indigo)의 시억(詩憶)으로 고요히 갈무리한다

잊히지 마라, 사라지지 마라.
오늘 내가 온몸으로 맞은 이 물줄기 소리와
입안에 감도는 고소하고도 비릿한 생(生)의 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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