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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규 Jakyu Chun Aug 02. 2024

2. 태풍의 접근. 시련에는 이유가 다 있다.

작년 여름의 건강검진까지

- 이 글은 현재 대장암 4기 투병 중인 저의 투병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쓰는 글입니다. 얼마나 자주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이 허락하는 대로 자주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 오신 나그네 분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 30대 남자들은 자기 건강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우스개처럼 들릴 수 있지만, 주변을 둘러봤을 때 은근히 사실에 가까울 것 같은 문장이다. 아니면 다들 바빠서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미뤄두다가 시기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사람의 건강에는 당연히 좋지 않다.


내년 생일이 지나면 새로이 바뀐 나이로도 마흔 살이 되는 나에게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2018년 여름에 회사에 입사한 후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기존 질병이 있기 때문에 결과들이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경우가 많았다. 직장인들이 필수교양 (?)로 가지고 있는 역류성 식도염 같은 것은 나도 있었고, 그 외 자잘한 것들이 꼬리를 물고 검진결과지를 수놓았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것은 요즘 정말 흔한 간 질환, 즉 지방간이나 높은 간 수치 등은 나온 적이 없다는 것 정도? 내 주변도 정말 다양한 질병들이 결과지에 줄줄이 찍혀 나왔다. 간 수치, 지방간, 통풍, 고혈압, 고지혈증 등... 아무래도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길고 되지도 않는 실험결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연구원들이다 보니 더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나는 휴직 중이지만 요즘 내 원소속 팀의 팀원들이 갈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병이 안 생기는 게 신기할 정도니.


5. 궤양성 대장염의 그림자 - 빈혈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결과지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은 바로 적혈구 수치 (또는 헤모글로빈 수치, Hb). 염증 때문에 비록 눈에 보이는 혈변이 나오지 않더라도 장 내에서 지속적으로 출혈이 있고 이것이 시나브로 변에 섞여서 나오기 때문에 적혈구 수치가 일반인에 비해 항상 훨씬 낮게 나왔다. 즉 항시적인 빈혈 상태. 이런 몸 상태로 2020년 구정 때는 당시 여자친구이자 지금의 아내와 함께 노르웨이 여행을 갔다 왔었다니, 무모하기도 참 무모했다. 어쩐지 공원 언덕 올라가는데 숨이 너무 빨리 차더라 (결국 여행 직후 입원해서 수혈을 받아야 했다. 적혈구 수치가 일반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됐었다니, 더 오래 버텼으면 골로 갔을지도...).


빈혈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또 있는데, [조금 끔찍한 일이었어서 읽기 싫으신 분들과 심약하신 분들은 넘기셔도 된다] 아마 2013년 아니면 2014년 늦여름쯤이었던 것 같다. 대구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올라오는 KTX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좌석이 만석이라 어쩔 수 없이 입석표를 끊고 열차 칸 사이의 복도, 그중에서도 화장실 근처 짐 놓는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난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저 때는 몸이 바닥을 찍고 겨우 회복을 조금 한 때였고, 따라서 인근에 화장실이 있는 것이 심리적으로 큰 안정을 줬기에 고른 자리였다 (누가 화장실 들어가기만 하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기차가 동대구역을 출발해서 어느덧 서울역 바로 전인 천안아산역에 진입할 즈음이었나. 대전역에서도 자리가 나지 않았기에 이때도 복도에 쭈그리고 있다가 (성심당 빵 냄새는 그때도 풍겼던 것 같다) 천안아산역에서 내리는 분들을 위해 잠시 일어나서 옆으로 비켜있으려던 순간,


잠시 인생의 3초 정도가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전에 대전역에서도 비키려 일어설 때 약간의 기립성 빈혈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정신이 들어보니 아직 열차는 천안아산역에 진입 중이어서 승객들이 문 앞에 모여있었는데 다들 웅성이며 나를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안경이 날아가서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했으니까. 영문을 모르고 몸을 일으키던 내 눈에, 사람들의 얼굴과는 달리 또렷하게 보였던 것은 내 얼굴 바로 앞 바닥에 있던 붉은 웅덩이.


피가 한 움큼 바닥에 고여있었고, 안경은 한 1 미터쯤 떨어진 곳에 날아가있었는데, 코받침대에 뭔가 끼어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제정신이 안 든 나는 일단 안경을 집어 들었고, 끼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것은 내 살점이었다. 얇지만 길이는 한 1 센티를 조금 넘었을까.


순간 몸이 굳었고, 그제야 왜 내 앞에 붉은 웅덩이가 있고 그게 누구의 피인지 서서히 깨달았다. 그리고 제야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허우대 멀쩡한 남자애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화장실 문고리에 얼굴을 찧었고, 그 과정에서 안경이 눌리면서 코받침대가 인중에 걸렸던 것이다.


당황한 마음에 일단 상태를 확인하려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봤더니, 코받침대가 있던 오른쪽 콧등이 조금 긁혀있었다. 거기서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리니 인중 한가운데에서 살짝 빗겨 난 곳에 피부가 스테이플러 심 모양 (ㄷ을 90도 돌린 모양)으로 열려있었다. 나올 피는 이미 거의 다 나왔는지 새하얀 속살이 뽀얗게 보였다. 너무나도 황망해서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일단 휴지로 대충 지혈하고 복도의 피를 닦아낸 뒤 화장실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잠갔다. 처음 겪은 이 일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 몰라서.


몇 분 지나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지혈을 한 후 화장실 문을 열고 검표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역을 출발하면 검표원이 항상 기계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봤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천안아산역이 종착역 바로 전 역이고, 이때는 검표원이 굳이 안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울역에 열차가 도착했고 난 휴지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역무실로 갔다. 나의 몰골을 본 역무원들이 놀래서 119를 불렀고 곧 구급차가 와서 인근의 (지금은 사라진) 서울백병원 응급실로 나를 싣고 갔다.


그나마 이때 재밌었던 것은 내 상처를 꿰맨 성형외과 의사가 너무나도 내 대학원 때 사수와 닮았었다는 것 (도플갱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때 믿게 됐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코레일이 나를 대신해 스스로 열차 서비스 부족으로 신고처리하고 의료비를 모두 낸 것이었다. 난 그런 걸로 민원신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혹시라도 민원신고가 있을까 해준 것일지도 (그때 열차 승무원 분들께 불이익이 가지 않았기를...).


6. 6월에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작년 6월 20일에도 어김없이 건강점진의 계절이 돌아왔고 얼마 후 결과지가 스마트폰으로 왔다. 평소처럼 대충 쓰윽 넘기다가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혈액검사 결과에서 CEA와 AFP라는 수치들이 예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이다. 특히 CEA는 10배 넘게 올랐다. 찾아보니 CEA는 대장암 표지자, AFP는 간암 표지자. 즉 둘 다 종양표지자였고 AFP는 그래도 정상 범위를 살짝 넘었지만 CEA는 3배를 넘었다. 검진의 소견에는 의사를 찾아가서 추가 검사를 하라고 되어있었다.


이쯤 되면 빨간불이 빙글빙글 돌면서 경고음이 뇌 속에서 울리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30대 남자의 오만은 대단해서, 이를 보고도 '아 조금 이상하네. 흠... 두 달 후에 주치의 예약이 되어있으니 그때 물어봐야겠다' 정도의 생각만 했다.


이상한가? 미련한가? 그렇다, 지금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저때는 뭔 생각을 했는지 (아니, 생각을 안 한 거다) 충분히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결과지는 나의 메일함에 조용히 묻혀버렸다. 며칠 동안은.


찻잔 속의 불길한 평화 (?)는 며칠 후 아내가 결과에 대해 물어보면서 끝났다. 별생각 없이 결과지를 보여준 남편과 달리 아내는 훨씬 현실감각이 뛰어났다. 당장 의사 진료를 잡으라고 했고, 가능한 가장 빠른 주치의 진료가 7월 20일이었기에 이때로 예약을 당겼다. 그렇게 진료일까지 약 3주 정도 불길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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