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치우친 글쓰기

비우고 나면 남는 것들

by 방덕붕

글을 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건가, 아니면 감정을 배설하는 건가.

배설. 그 단어가 떠오른 순간 멈칫했다. 표현도 아니고, 토로도 아니고, 배설. 뱃속에 있으면 안 될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 그렇다면 내 감정은 뱃속에 있으면 안 될 것인가. 아니면 글이라는 형식이 그걸 받아줄 그릇이 아닌 건가.


아침에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간다. 참을 수 없다. 쏟아낸다. 끝나고 나면 시원하다. 그런데 찝찝하다. 다 나온 것 같은데 뭔가 남아 있다. 점심을 먹고 또 간다. 이번엔 더 격렬하게. 그리고 마침내 비워진 뒤에 찾아오는 건 상쾌함이 아니라 허무함이다. 이게 뭐였나 싶은.


감정에 치우친 글쓰기도 그렇다. 가슴에 뭔가가 꽉 차서 견딜 수 없어 쓰기 시작한다. 쏟아낸다. 문장이 달리고, 문단이 쌓이고, 어느새 꽤 많은 양이 나온다. 그런데 다 쓰고 나면 허무하다. 읽어보면 찝찝하다. 분명 진심이었는데 글이 되질 않았다. 날것의 감정은 나왔는데, 그게 누군가에게 읽힐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배설과 글쓰기의 차이는 아마 여기에 있다. 배설은 나한테서 빠져나가면 끝이다. 변기 물을 내리면 된다. 하지만 글은 빠져나간 뒤에도 형태를 갖고 남는다. 누군가의 눈앞에 놓인다. 그래서 단순히 비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어떤 변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변환이라는 게, 감정이 폭주하는 와중에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가슴에 쌓인 것들이 있다.


어릴 적의 나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시절의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알고, 그걸 글로 쓰려 한다. 그런데 쓰려고 앉으면 감정이 먼저 달려나간다. 구성을 생각하기도 전에 문장이 흔들린다. 허둥거린다. 머리로는 배치를 고민하는데 가슴에서는 뭔가가 자꾸 밀고 올라온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이야기를 쓰려 한다. 분명 이건 소설이 될 수 있는 소재다. 그런데 막상 키보드 앞에 앉으면 분노가 먼저 나온다. 억울함이 먼저 나온다. 소설이 아니라 고발문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것이다. 감정을 빼면 글에 힘이 없고, 감정에 치우치면 글이 제 자리를 못 잡는다. 어디가 적정선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했다. 어쩌면 순서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먼저 쏟아내야 한다. 읽힐 걸 생각하지 않고, 형태도 갖추지 않고, 그냥 가슴에 있는 걸 꺼낸다. 배설이면 배설이어도 좋다. 아무한테도 보여줄 필요 없다. 그냥 쓴다.


그리고 며칠 묵혀둔다.


다시 보면 조금 거리가 생긴다. "아, 내가 여기서 이렇게 흔들렸구나." "이 대목에서 이렇게 화가 났었구나." 그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변환이 가능해진다. 날것의 감정을 글의 재료로 다시 만지는 것. 글의 완성도는 첫 문장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편집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하지만.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이 있다. 아침부터 배가 아프고, 남이 내리지 않은 변기 앞에 서고, 강아지는 소파에 오줌을 누고, 카드값은 늘어나고, 아무도 내 사정은 물어봐 주지 않는 날. 그런 날에는 순서고 변환이고 다 부질없다. 그냥 힘들다. 고독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날에 드는 생각이 있다. 내 곁에서 나를 알아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없다는 것. 그 사람을 통해서 느꼈던 돌봄도, 하느님의 손길도,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 해도, 이건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부재의 문제다. 빈자리가 너무 크면 감정이 거기로 쏟아지는 건 당연하다.


의미를 붙이면 짐이 되고, 의미가 없으면 슬프다. 어디로 가도 안 되는 날이 있다.


감정에 치우친 글쓰기가 나쁜 걸까.


다만 이런 건 알 것 같다. 감정에 치우친 글은 글쓴이를 위한 글이고, 감정을 변환한 글은 읽는 이를 위한 글이다. 둘 다 필요하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도 없다. 가슴에 쌓인 것을 먼저 꺼내지 않으면 변환할 재료 자체가 없

으니까.


그러니 오늘은 치우쳐도 된다. 허둥거려도 된다. 배설이어도 된다.


다만, 며칠 뒤에 다시 꺼내 보자. 그때는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조금만. 뒀다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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