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이 숨쉬는 만큼
인간이 신을 믿는 건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 돈, 좋은 배우자, 가족의 평안. 아무것도 안 바라면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말을 듣고 따라간 건데, 그 나라에서 자기 자리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스승님의 나라에서 제 두 아들에게 좋은 자리를 달라"고 청한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은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핍박받을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하셨죠. 따라오면 고생할 거라고.
대신 남기신 명령은 하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누군가 그 "서로"에 방점을 두더군요. 일방적으로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거라고.
그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서로"가 빠지면 일방적인 희생이 되니까요. 너는 계속 퍼줘라, 상대가 어떻든. 그러면 착취당하는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서로"가 있으면 관계가 됩니다.
주고받는 것. 내가 사랑하면 상대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
가톨릭 성가 322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날 먼저 사랑하신 주는 사랑받기 원이시라 내 가슴이 숨쉬는 만큼 주님 사랑하리이다"
하느님이 먼저 사랑하셨고, 그리고 사랑받기를 원하신다. 일방적인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기복신앙과는 다른 구조가 됩니다. "믿으면 복 줄게"가 아니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해라." 거래가 아니라 관계.
그런데 질문이 생깁니다. 하느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사랑하는 걸까요.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래도 방법이 있습니다. 곁에 있어주고, 말 걸어주고, 필요한 거 챙겨주고.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까요.
요한 1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답이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사랑하는 건 우리 능력 밖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가스라이팅 같은 거라면 아니겠죠.
"너를 위한 거야"라면서 조종하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이 진짜 사랑인 건,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도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안 따라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돌아갔을 때도 그냥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빙자한 통제.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어쩌면 신앙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부모 친형제 간의 사랑에 사람들이 더 크게 상처받고, 그 상처가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형상이 다 다르기 때문이죠.
부모는 "널 위해서"라고 하고, 자식은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닌데"라고 느끼고. 둘 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형상이 달라서 어긋나는 겁니다.
그러면 내 맘대로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받으려고 하는 건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게 그 사람이 아는 사랑의 방식이니까요. 우리가 아는 방식은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내가 배운 대로, 내가 경험한 대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면 문제가 생깁니다. 상대가 "난 그게 아닌데"라고 해도 "아니야, 이게 사랑이야"라고 하면. 그건 소통이 아니라 일방통행이 되니까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대로도 아니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도 아닌,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건 "형태"가 아니라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완성된 그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계속 조율해가는 그 과정 자체가 사랑인 게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줬는데 상대는 불편해한다. 그러면 "왜 불편해?"라고 묻고, 듣고, 다음엔 조금 다르게 해보고. 상대가 이렇게 줬는데 내가 불편하다. 그러면 말하고, 상대도 듣고.
나를 그대로 보여주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넘겨짚지 않고, 상상으로 채우지 않고. 그게 소통의 시작이듯, 사랑도 거기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그 "주고받으면서 맞춰가는 것" 자체가 사랑의 모습인 겁니다.
그래서 "서로"가 중요한 거고. 일방적으로 맞추는 게 아니라 둘 다 움직이는 거.
그러면 결국 끝이 없는 거네요. 완성형이 없는 겁니다. 계속 맞춰가야 하는 거.
어쩌면 그게 "영원히 사랑한다"의 진짜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완성된 사랑을 영원히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맞춰가겠다는 것.
보통 사람들은 사랑을 "감정"이나 "상태"로 생각합니다.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느낀다. 두근거림, 설렘, 행복함. 어느 순간 그 감정이 사라지면 "사랑이 식었다"고 하고.
"소유"의 개념도 있습니다. 내 사람, 내 연인, 내 가족.
"완성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퍼즐이 맞춰지듯 딱 맞아떨어진다. 그러면 끝. 해피엔딩.
그런데 사랑이 과정이라면, 감정이 식어도 끝이 아닙니다. 맞지 않아도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인 거죠. "어, 이 부분이 안 맞네. 어떻게 할까?" 그걸 같이 고민하는 게 사랑이라면.
드라마나 영화는 결혼하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상대방에게 맞춰주고 싶지 않게 되면, 그 사랑은 끝나는 걸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맞춰주고 싶지 않다"와 "맞춰줄 힘이 없다"는 다릅니다. 지쳐서 잠시 멈추는 거랑 완전히 포기하는 건 다르니까요. 그리고 나만 계속 맞추고 상대는 안 맞추면, 그건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 관계에서 떠나는 게 사랑을 포기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는 끝나도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함께 맞춰갈 수는 없지만,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것들. 그것도 사랑의 어떤 형태 아닐까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과정입니다.
낳고, 키우고, 성장하는 걸 보면서. 아이가 어릴 때는 "엄마 아빠 사랑해" 하면서 매달립니다. 그런데 점점 크면서 자기 세계가 생기고, 친구가 더 중요해지고, 부모는 귀찮아집니다.
어느 순간 짝사랑이 되어갑니다. 돌아오는 게 줄어들어도 부모는 계속 사랑합니다.
그래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하느님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제자들 다 도망가고,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그래도 부활하시고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시면서.
부모의 사랑이 짝사랑이 되어가는 것. 그래도 그만둘 수 없는 것. 그게 어쩌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신에 가까운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가톨릭 성가 가사가 다시 떠오릅니다.
"내 가슴이 숨쉬는 만큼 주님 사랑하리이다"
숨쉬는 만큼. 숨은 한 번 쉬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쉬는 겁니다.
사랑도 그런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