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보자

있는 그대로

by 방덕붕

오랜 친구의 아버지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89세. 혈액암과 치매를 함께 앓다 가셨다고 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거의 30년 만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삶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생각보다 정정하셨습니다.

문상을 마치고 간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또 보자."


그런데 그 눈빛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웠다. 우리가 또 보겠냐. 잘 살아라. 세 문장이 동시에 들렸습니다.


집까지 거리가 있어서 운전하는 시간이 꽤 길었습니다. 라디오를 켜지 않았습니다. 그냥 달렸습니다.

어느 순간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 오늘 괜찮았나. 말 실수는 없었나. 옷이 이상하진 않았나.

30년 만에 만난 사람들입니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요. 그것보다는, 그들이 뒤돌아서 내 흉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앞에서는 반갑다, 잘 지냈냐, 만나서 좋다. 뒤돌아서는 다른 이야기.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장면들이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더 주의하고, 더 조심하고, 앞뒤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열 배로 분노하는 사람.


가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받기 전의 나. 흉터가 생기기 전의 나. 그걸 돌려달라고. 그런데 그 일의 가해자들은 자기가 뭘 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제일 잔인한 부분입니다. 피해자는 평생 가지고 가는데, 가해자는 다음 날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미사에 갔습니다. 거의 반년 만이었습니다.


복음은 마태오 복음 4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안드레아가 그물을 던지는 걸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는데, 부르심을 받자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따라갔습니다.

신부님은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결단한 것이라고.


나는 그게 좀 불편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찾아와서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제자들에게도 욕심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새 사람이 되겠다는 거룩한 결단이 아니라, 한자리 하겠다는 기대.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다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나는 오히려 그게 진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으로 시작해서, 무너지고, 도망가고, 부인하고, 그러고도 다시 돌아온 사람들. 그게 더 믿을 만합니다.


그런데 왜 그걸 "과거를 버린 아름다운 결단"으로 만드는 걸까요. 불편한 것은 잘라내고, 깔끔한 것만 남기고. 편집된 예수. 그리고 그 편집본을 기준으로 "너희는 왜 이렇게 못 사느냐"고 묻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어머니의 눈빛을 생각합니다.


그건 무편집본이었습니다. 잘라낸 것도 없고 덧붙인 것도 없었습니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할 말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 남편을 보낸 직후라는 상황, 그 모든 것을 지나서 그냥 "또 보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 건강하시구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오겠다는 말, 또 뵙겠다는 말. 그런 건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건 텍스트에 의미를 덧씌우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는 사람은 편집하지 않고, 듣는 사람은 상상으로 채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는 자꾸 넘겨짚습니다. 저 말이 무슨 뜻일까. 왜 저렇게 말했을까. 혹시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채우고, 그 상상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오해는 갈등이 됩니다. 정작 상대방의 말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있지 않았는데.


때로는 속내를 감춰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건 압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건, 어쩌면 나를 그대로 보여주고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그 어머니의 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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