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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6-1,2

by 강정민

6-1.


서울 외곽의 고시원. 벽엔 여전히 검은 천이 걸려 있었지만, 창문 아래 놓인 작은 화분에 조그만 새순이 올라와 있다. 지민은 아침마다 그 화분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름도 모르는 식물이다. 노트에 ‘무언가’라고 적힌 택배 상자와 함께 배달된 화분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 식물이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지민은 고시원을 나서며 오늘도 취업 면접에 갔다. 요즘 그는 매일같이 면접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복장을 갖추는 법, 면접관의 눈빛을 읽는 법, 적절한 호흡과 억양, 모범 답안의 패턴까지 완벽히 익혔다.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합격도 없었다. “성실하지만 인상에 남지 않네요.”라는 말이 자주 돌아왔다. "사람은 기억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도 그는 메모해두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기억에 남는지는 몰랐다.


감정을 억제하고 계산만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에게 '색'이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면접을 마치고, 그는 근처 도서관에 들렀다. 잠시 쉰다는 핑계였지만, 사실은 늘 그곳에 오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말 한 마디 섞은 적 없었지만, 지민은 그녀의 자리에 햇빛이 드는 각도를 기억했고, 그녀가 사온 커피 브랜드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종종 눈을 감고 입꼬리를 올릴 때, 지민은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간지러웠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지민은 처음엔 분석하려 했다. 미소의 각도, 맥박의 속도, 시간대별 표정 변화. 그러나 아무리 분석해도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 남았다.


그날, 윤은 책을 덮고 갑자기 지민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여기 자주 오시죠? 저번에도 본 것 같아서요.”

지민은 얼어붙었다. 계산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네.”

“같이 밥 먹을래요? 오늘은 좀 지쳤거든요.”


그날 저녁, 둘은 근처 분식집에서 김치찌개를 먹었다.

지민은 윤이 자꾸 웃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밥을 먹으며 대화가 오갔고, 윤은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 씨는, 뭐 좋아해요?”

지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선택지에 없었다. 지민은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저는… 잘 안 물어봐서요. 저한테.”

윤이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 나랑 같이 물어봐요. 우리 둘 다.”


지민은 그날 밤, 고시원으로 돌아와 오래된 노트를 펼쳤다. 예전엔 계산만 적던 그 노트. 오늘은 ‘윤’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아래에, 단 하나의 문장을 썼다.

“이 사람은, 내 계산에 없었다.”

손이 떨렸다. 계산되지 않는 감정. 예측할 수 없는 관계. 그건 위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처음으로 가슴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지민은 꿈을 꿨다. 다 자란 화분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작은 쪽지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민, 살아 있는 건… 언제나 계획 밖이야."


그는 잠에서 깨 눈을 떴다. 화분은 여전히 작았지만, 잎 끝이 햇빛을 향해 살짝 기울어 있었다. 지민은 생각했다.

‘이 삶이… 살아갈 만한 걸까?’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문장이 떠올랐다. 그의 필체로 쓰인, 그러나 분명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문장.

“지민, 너는 지금 시작하는 거야.”

지민은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왜… 윤이 좋지?”


6-2.


붉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다. 나딤은 폐허가 된 병원 옥상에 앉아, 발밑으로 펼쳐진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다. 밤은 어둡지 않았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 사이사이엔 드럼통에 불이 피워졌고, 그 곁엔 아이들이 모여 있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나딤의 옆에 있었다. 이름은 ‘살림’. 가끔은 말을 너무 많이 했고,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딤은 처음에 그를 멀리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살림이 따뜻한 빵 하나를 나눠주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거절하지 않았다.

“형, 난 왜 아직 살아 있을까?”

“그런 질문 하지 마.”

“왜?”

“…답이 없으니까.”

나딤은 대답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질문이 마음에 남았다.


어느 날, 나딤은 살림에게 자신이 숨겨두었던 빵 조각과 낡은 천을 건넸다. 그 순간, 자신이 누군가를 의식적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에게 배운 생존 규칙엔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며칠 후, 마을 남쪽에서 구호물자 수송 트럭이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두가 뛰어갔다. 나딤과 살림도 그 흐름에 섞였다. 트럭 주변은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어른들이 발을 구르고, 아이들이 밀려 쓰러졌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고, 경찰의 총성이 공중을 가르며 울렸다. 나딤은 살림의 손을 꽉 잡았다.

“절대 놓지 마.”

그러나 그 순간—

폭음. 뒤편에서 뭔가가 터졌다. 사람들이 밀려 넘어졌고, 그 혼란 속에서 손이 놓였다.

“살림!”

나딤은 외쳤다. 하지만 목소리는 소음에 묻혔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뚫고 나갔다. 살림을 찾아 골목마다 뒤졌다. 폐허가 된 교실, 무너진 지하실, 쓰러진 벽 틈.


그리고, 마을 회관 옆 버려진 창고 앞에서 —작은 손이 바닥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살림이었다. 숨이 끊어져 있었다. 손엔 쪽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나딤은 떨리는 손으로 그 쪽지를 펼쳤다. 그 안엔, 삐뚤삐뚤한 글씨.

“형, 내가 다시 없어져도… 그래도 누군가는 믿어줘야 해.”

나딤은 주저앉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믿은 대가가 이것이라면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그는 다시 다짐하려 했다.

그런데 살림의 작은 가방 안에서, 낡은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그가 며칠 전 나딤에게 받은 천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쪽지. 그것은 나딤이 어릴 적 어머니에게 썼던, 아직 읽히지 않은 쪽지였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나, 혼자 아니죠?”

그 종이는 집이 무너질 때 사라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의 손에 돌아왔다.

“어떻게…”

나딤은 숨이 막히는 듯 속삭인다.

“살림… 네가 가져온 거야?”

살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쪽지는 대답하고 있었다. 나딤이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일어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림의 손을 가만히 쥔다.


“그래. 너를 믿을게.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믿을 거야.”


나딤이 살림을 안고 뒷산의 무너진 공동묘지 언덕으로 올라간다. 돌무더기 사이에 자리를 만들고,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힌다. 입을 열고 중얼거린다.


“신뢰는… 잃었을 때가 아니라, 감당할 때 진짜가 되는 거야.”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이 분다. 모래가 무너진 벽을 스쳐 지나고, 구름 사이로 달빛이 내려온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누군가 말한다.


― 나딤, 너는 살아 있는 거야. 너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딤이 고개를 든다. 눈물이 흐른다. 오래전 잊어버린 감정의 회로가 다시 열리고 있었다. 그는 살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엔… 내가 지킬게.”


나딤이 돌아서서 마을 쪽으로 다시 걸어간다.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손을 내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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