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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디앤디 Oct 05. 2024

수면 아래




  카메라의 플래시가 퍼덕인다. 푸드덕, 푸드덕. 한 남자가 단상에 올라선다.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 있다. 그의 소설 <수면 아래>가 프랑스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소박한 동네 책방은 기자들이 들이대는 카메라와 마이크로 인해 기자회견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는 은근히 그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북토크에 참여한 독자마저 책에 쓰인 글보다는 그에게서 나올 말의 진위에 더 관심을 쏟았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이 일치하기를, 또 다른 어떤 이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이 사실인가요?”

기자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단상에 올라선 그에게 질문한다. 그가 허리를 굽혔다 펴기가 무섭게 질문을 들이댄다. 마치 기선을 제압하려는 듯이. 이에 질세라 또 다른 기자가 질문을 이어간다.

  “소설 속의 그 여학생이 교수님의 사생아 맞습니까?”

층고가 높은 책방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웅웅 울리기 시작한다.

  “자~자. 여기는 북토크하는 자리입니다. 기자회견장이 아닙니다. 나중에 별도로 질문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토크 진행자가 갑작스러운 소란을 가라앉혀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진정들 하시고 자리에 앉아 주세요.”

작가의 한마디에 북토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마련된 자리에 앉는다. 맨 뒤에 한 여자를 제외하고. 웅웅 울리던 소리도 그의 기세에 눌려 사그라든다.

  “북토크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고…. 기왕 이렇게 된 것, 북토크를 기자회견으로 바꿔야겠네요.”

마치 이렇게 되기라도 바란 것처럼 여유가 넘친다. 아니 능청스럽다.

  “그래, 뭐가 그리 궁금하신가요? 한 사람씩 질문을 받겠습니다.”

 그제야 북토크 진행자는 자신의 역할을 찾은 듯 손을 들고 질문을 하려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지목한다.

   “이 작품은 오토픽션(auto-fiction)인가요? 픽션(fiction)인가요?”

   “소속이나 이름 정도는 알려주고 질문해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그는 질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무례한 태도가 불쾌했던 것인지 대답 대신 질문을 한다.

  “그게 중요한가요? 월간 문화예술의 최영민 기자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중요할 수도 있죠. 이미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오토픽션에 속하겠지요. 설마 책도 안 읽고 질문을 한 건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게 중요한가요?”

기자는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힌 양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리고 그 남자 역시 가시가 돋친 대답에 이어 기자의 말을 복창하듯 되묻는다. 그게 중요한가요? 그러게, 그게 중요한가?

  “확실히 해두고 싶었습니다. 오토픽션이라면 등장인물들이 존재했던 사람이거나 우리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소설 속의 인물이 우리가 추측할 수 있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 작품 속 여학생이 실존 인물이고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나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모두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그가 직접 자기 입으로 했다. 그 많던 입들은 다 어디로 가고 귀만 쫑긋 세우고 있다. 그 바람에 두 배로 긴장감이 돈다.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듯 무거운 침묵을 깨고 결연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을 이어간다.

  “그 여학생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더욱이 내 딸도 아니고요. 한마디로 허구라는 말입니다.”

또다시 책방은 웅성거림으로 탁해지고 만다. 그의 말이 진실이든 왜곡이든 두 갈래로 갈라진 사람들의 간극은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찍혀 버린 낙인도 지울 수는 없었다.

  “다른 질문을 받겠습니다.”

과열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진행자가 안쓰럽다.

  “오늘일보의 김관식 기자입니다. 이번 소설의 문체가 기존 작품들에 비해서 많이 다르다는 평과 함께 대필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토크 자리가 아니라 작가를 성토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다. 이 정도면 주눅이 들 만도 한데 강단에서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 뻔뻔함을 두른 꿋꿋함을 선물해 준 모양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썼습니다. 그런 데다 자전적 소설이니만큼 충분히 문체가 바뀐 것으로 보일 수 있겠네요. 하지만 대필 의혹은 억지입니다.”

그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해명으로는 부족한 듯 기자는 질문을 이어간다.

  “그러면 누군가 교수님과 교수님의 작품을 음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쯤에서 마무리합시다. 좋은 질문은 더 이상 없을 것 같군요.”

그 작가는 서둘러 자리를 뜬다. 모두가 저마다 풀지 못한 의혹의 보따리를 다시 싸맨 채 돌아간다. 맨 뒤 출입구 옆에 서 있던 그 여자를 중년의 여인이 낚아채듯 끌고 나갔다.



  그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믿었다. 그는 나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도. 그 책이 발한 빛은 내게도 한 여자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원한 것은 밝은 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그 빛이 가진 이면을 보지 못했다. 그때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지난해 이맘때다. 아버지는 내가 쓴 습작들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중 하나의 습작을 끝까지 읽으시고는 제법 글이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도 나는 지도교수로 아버지가 아닌 다른 교수를 택해야만 했다. 그게 서운했던 것인지 석사 논문에 대해서도 일절 말이 없으셨다. 학부 시절의 아버지와는 다른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던 분이 칭찬을 해주다니.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글에 대한 촌평도 조언도 없었다.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내 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나의 문체는 차이가 크게 난다. 아버지는 화려한 문체를 선호하지만 나는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스타일을 추구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넘어서고 싶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내가 글 쓰는 스타일을 간결하게 가는 것이 아버지의 그것과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꼽자면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


  그러던 나에게 아버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했다. 같이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하셨다. 부자간의 공동 작업이라…. 생각만 해도 설렜다. 타이핑만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글의 전체적인 뼈대는 아버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하자고 하셨다. 직접 쓰시면 회고록이 되어 버릴 것 같다고. 그래서 세부적인 내용은 내가 쓰고 아버지가 감수하는 방식으로 하면 어떨지 싶다고 했다. 바로 하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며칠 생각해 볼 시간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을 공동 작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부터 의심스러웠다. 아버지가 내 습작들을 보고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인가. 그렇다면 해볼 만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청춘들을 엿볼 기회도 될 테고, 아버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뭔가 이빨 사이에 낀 가시처럼 좀처럼 개운치 않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뽑고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설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사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던 아버지의 과거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일부의 등장인물들에 관하여 사실을 말하듯 막힘없이 설명했다.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했다. 때로는 아버지로서는 밝히면 안 되는 치부까지도 드러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그건 그저 소설로 머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날로그 필름은 나를 거치면서 선명한 디지털 영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나는 필름을 다시 돌려 등장인물들을 실존하도록 만들었다. 아버지의 꿈과 바꿔버린 여자.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딸. 그들은 실존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국문과 교수 중 한 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 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나는 일부러 아버지의 수업은 피해서 수강 신청을 해야 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차피 아버지의 잔소리는 집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학부 시절 같은 국문과 두 학번 위의 그 여자 선배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격의 없이 대했고 그런 나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같았다. 혹시 연하를 좋아하나, 아버지인 교수에게 좋은 말이라도 건네주길 바라는 건가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오해하고 나름 거리감을 두며 그 선배를 대했다. 철없이 1학년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니 그 선배는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그 선배를 보았다. 그 선배였다. 아버지가 읊어 준 소설 속의 그 여학생이 선배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 주위를 맴돌았구나. 그 선배는 알고 있었구나. 내가 동생이고, 선배가 누나라는 것을. 나는 그 선배에게 연락했다.



  선배는 흔쾌히 나를 만나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매로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다니던 그리고 아버지가 다니는 학교 앞 카페에서. 학부 시절 자주 들렀던 카페다. 잔잔한 음악에 한참을 앉아 공부해도 엎드려 자도 눈치를 주지 않던 카페다. 사장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편안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는 먼저와 있었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카페까지 오면서 고민했다. 정작 나온 호칭은 선배님이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었으니 당연했지만 어색함에 소리는 가늘었고 흔들리고 있었다.

  “안녕. 후배님. 뭐라 불러야 할지 오면서 생각을 많이 했는데 결국엔 후배님이네. 학교 밖에서 만나서 그런가? 좀 어색하다. 그치.”

익숙한 카페, 어색한 만남. 서로가 남매가 아닌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의 선후배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의례 하는 질문들이 오가고 나니 어색함이 커피와 함께 식어갔다.

  “선배는 알고 있었죠? 제가 동생이라는 거”

선배도 이 자리에 나오면서 예상했을 것이다. 내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를. 불쑥 만나자고 한 의도를 밝힌다.

  “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누가 그래? 교수님은 아닐 테고.”

  “말해 주세요. 선배가 알고 있는 것.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성급한 마음에 선배를 다그치고 말았다. 순간 선배가 입을 다물면 어찌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선배는 차분하게 답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니가 교수님 아들이라는 거 정도만 알았어. 니가 내 동생이라는 것은 1학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 알았고.”

그때까지 선배도 아무것도 몰랐다고 했다. 단지 교수님 아들이 어떤 놈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아버지 후광만 믿는 철없는 놈이면 어떻게 골려줄지 선배들끼리 궁리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이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배도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얘기다. 어찌 알았을까 궁금했다.

  “그럼, 선배는 교수님이 선배 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그 사연은 어찌 보면 웃픈 이야기지. 궁금해?”

  “네”

내겐 사연보다도 아버지한테 듣고 알게 된 건 아닌지, 그게 궁금하고 중요했다. 하지만 선배의 스치듯 지나가는 옅은 미소에 얼떨결에 바로 네라는 답이 나왔다.

  “우리 엄마한테 네 얘기를 했지. 교수님 아들이 우리 과에 입학했는데 꽤 괜찮은 아이라고. 그랬더니 며칠 후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해 주더라. 니가 내 동생이라고. 이건 슬픈 이야기고. 웃긴 얘기는 엄마는 혹시 너하고 내가 연애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야. 웃기지.”

그렇다. 듣는 사람에 따라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웃기지는 않았다. 슬프기만 했다. 말을 마친 선배의 씁쓸한 표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웃긴 건 잠깐이었고 슬픈 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생각보다 편안한 사람이고 그늘진 곳 없이 잘 자란 사람 같았다.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도 담담하게 농담을 섞어 가며 답을 해주는 선배가 고마웠다. 이 사람과 누나와 동생으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그럼, 그때까지 아버지의 존재도 몰랐던 거예요?”

  “몰랐지.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어. 한꺼번에 두 남자가 내 인생에 훅하고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학교를 그만둘까도 했어. 너랑 얘기하고 싶었지만, 너는 모르는 것 같았고 교수님은 나를 딸로 인정하지도 않았어. 오기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고 여기까지 왔지.”

  “다음에 만나면 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버지가 나를 인정한다면 모를까. 난 취업하고 일하다 보니 예전처럼 살아가게 되더라. 처음부터 아버지나 동생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네 생각은 나더라. 건너 건너 소식도 듣고.”

그렇게 나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 같은 누나를 보냈다. 그리고 누나를 다시 찾고 싶었다.




  객관성을 상실한 기억은 소설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선배의 말에 더 신뢰가 갔지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옮겼다.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 글을 쓰는 것보다 있는 사실을 쓰는 게 훨씬 쉬웠다. 다만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쓴 것이 아니라 나는 선배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다 묘사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을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려냈다. 그것으로 나는 그 선배를 나의 누나로 만들고 싶었다.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 싶었다.

  아버지는 사실적 묘사를 반대는커녕 매우 흡족해했다.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내가 쓴 글이 좋은 작품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 같다. 나도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글을 써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몇 번의 퇴고를 거쳐 드디어 탈고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받으면서 개운치 않았던 그 무엇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공동 작업이라던 이 작품을 당신의 단독 작품으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고 다시는 이런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작품에서 내 이름을 빼야 한다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글을 쓰면서도 되묻던 질문이었다. 자신의 딸도 부정하고 이제는 아들의 작품마저 빼앗으려 한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결국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대신 내가 얻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나를 찾고 싶었다. 처음부터 있었고 마지막에도 있을 누나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다. 선배와 선배의 엄마에게 사과하고 딸로 인정하시라고. 아버지는 그러겠다고 했다. 


  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감추어진 채로. 그리고 소설 <수면 아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거기에 프랑스어 번역본은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사과나 인정은 없었다. 나는 작품도 잃어버리고 누나도 갖지 못했다.



  게시판에 글이 올라온다. 그리고 퍼진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 손으로 상자를 열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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