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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Jan 28. 2024

하루라도 젊은 날의 기록

매년 연초에 계획을 세웠다. 읽을거리, 배울 거리, 해야 할 거리 등을 나열하고 그 계획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연말에는 그중 반은 실현했던 것 같다. '같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억이 가물거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계획하고 실천했던 때가 벌써 십여 년 전쯤이다. 근 10년은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이직한 회사에 적응하기에 바빴고, 일이 너무 많은 곳이어서 거의 매일 10시, 11시에 퇴근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1일 14시간, 주 70시간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일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지치는 생활로 뭔가를 계획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스스로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 들수록 해가 바뀌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 이유도 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로 이어지는 붕 뜨는 마음은 차분해진 지 오래되었다. 그저 '세월이 가는구나'라는 마음에 아쉬움은 들지언정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번아웃(burnout)을 두 번 정도 겪으며 심신이 아픈 경험을 하고 나자,  워커홀릭(workaholic) 기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자 아무 계획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거창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고 가고 싶은 곳을 적어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잊고 있던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연초에 계획 세우는 것을 2022년부터 했다.  그전에는 나노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연간 계획, 월간 계획, 주간 계획, 일일 계획까지 목표달성을 위한 매일의 계획을 세웠다. 비록 지키지 못하더라도.  2022년부터 다시 세우기 시작한 계획은 연간 계획만 세웠다. 내용도 대략적으로만 적었다. 적은 내용도 단출했다. 연말에는 그 계획 중 지킨 것이 반도 되지 않았다. 단출하게 적은 것 마저 잘 실천하지 못했다.


2023년에는 계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었다. 몇 월에 무엇을 한다는 식으로 적었다. 그리고 해당 월에 그 일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중 하나가 '프로필 사진 찍기'였다. 주변에서는 운동을 열심히 하니 '바디 프로필(바프)'을 찍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사진을 찍을 정도로 몸매가 좋지 않거니와 '바프' 사진은 노출이 심했다. 나만 볼 사진이라도 과한 노출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은 찍고 싶었다. 모델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갖춰 입고 여러 포즈로 찍은 사진은 나중에 추억거리가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오늘이 제일 젊다'는 말처럼 얼굴 주름살이 더 생기고 탄력이 없어서 더 쳐지기 전에 지금의 모습을 남겨보고 싶었다.


프로필을 찍기 위해 피부과를 찾았다. 얼굴 잡티 제거와 리프팅을 도와주는 레이저 시술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리프팅에 도움 된다는 써마지(Thermage)라는 레이저를 받았다. 600샷을 얼굴에 쏘는 건데 마취 연고를 바르고 받아서 그리 아프지는 않았다. 시술 후 한 달 후부터 콜라겐이 차오르고 1년 정도 유지가 된다고 했다. 효과가 좋다면 1년에 한 번 정도 거금 주고 할 만하다 싶었다. 과연 2개월 후부터 팔자주름이 좀 펴지고 입술 주변 부분이 도톰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져 좋았다. 푹 꺼진 양쪽 볼살 주변도 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한 달 밖에 가지 않았다. 그 후는 다시 주름이 깊게 잡혔다.


다행히 프로필을 찍을 때는 그 효과가 유지 중이었다. 동네에 메이크업과 스튜디오를 같이 운영하는 곳이 있어서 멀리 갈 필요 없이 그곳에 예약했다. 처음엔 커리어우먼(career woman) 콘셉트로만 찍으려고 했는데 옷을 두 벌 입고 찍을 수 있는 패키지를 보자 드레스를 입고 찍어보고 싶었다.  드레스는 과거에도 앞으로도 입을 일이 없는 옷이니 한번 입어보고 싶었다. 이건 아마도 어렸을 적 세뇌교육받은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 소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에 대한 환상 말이다. 어쩌면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을 너무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여성성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어보고 싶은 마음은 오십 대 중반의 여자라도 품게 되는 마음이다. 좀 부끄럽기도 했는데 뭐 어떤가 싶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창피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싶었다. '나잇값' 못한다고 비난할 사람은 하라지. 하루라도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건 자유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드레스 샵에서 이 드레스 저 드레스를 입어보다가 두 벌 모두 드레스를 입고 찍기로 했다. 일하는 여자 콘셉트는 언제라도 찍을 수 있는 프로필이지만, 드레스 입고 찍는 사진은 앞으로도 없을 일이라고 생각하니 욕심이 났다. 드레스를 입으며 알게 된 사실은 혼자서는 절대 입을 수 없는 옷이라는 것이다. 입혀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온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의상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찍을 심산이었는데, 부랴부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업주부인 친구는 "재밌겠다"면서 흔쾌히 도와주기로 했다.  


사진 찍기 전 포즈를 연습했다. 스튜디오 작가가 미리 말하기를 "포토샵으로 모든 걸 수정할 수 있지만, 포즈는 수정이 안 돼요. 그러니 연습해 오시는 게 좋아요"라고 했기 때문이다.  화보 사진을 보며 자세를 연습해 보고 웃는 연습도 했다.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가게. 연습하면서 깨달은 것은, 연예인들도 웃는 연습을 했겠구나 하는 점이었다. 어떤 상황에도 웃는 얼굴이 자동으로 장착되는 순간을 만들기 위해, 그 웃음이 얼굴에 인식되어 진짜 내 웃음으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했을지 존경할만한 일이구나 싶었다.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는 법은 유튜브를 통해서 익혔다. 유튜브는 역시 없는 정보가 없는 곳이다. 웃는 법뿐만 아니라 주름 개선 마사지하는 법이 수 십 가지가 있었다. 써마지 같은 레이저를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마사지를 매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진을 찍는 날 휴가를 냈다. 아침 8시부터  메이크업을 2시간 가까이하고, 스튜디오로 이동하여 사진을 찍었다. 연습한 덕분에 어색하지 않은 포즈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뭐든 연습이 최고다. 사진작가가 포즈가 자연스럽다고 칭찬을 해주니 자신감이 붙어서 더 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수 있었다. 두 벌의 드레스 사진을 다 찍고 나자 2시 정도가 되었다. 굉장히 피곤했다. 연예인들이 화보 찍고 돈 버는 것을 보면 우리 같은 회사원에 비해 참 쉽게 돈을 번다 싶었는데, 나름의 고충이 있음을 잠깐의 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보정 전 사진에서 8컷을 골랐다. 수백 컷의 사진 중에서 고르려니 그것도 일이었다.  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가 다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사진 하는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기본적으로 봐야 하는 한 가지 꿀팁을 알려줬다. 양손이 자연스럽게 보이는지를 체크하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양손이 다 보이는 사진이 많지 않았다. 한 손은 뒷짐 지고 있거나, 드레스 자락 뒤로 감춰져 있었다. 포즈는 자연스러웠지만, 손은 드레스에 다 가려 있었다. 그렇게 가려진 손은 잘 못 보면 한쪽 팔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부자연스러웠다. 두 손이 다 보이는 포즈는 손을 마주 잡은 자세였는데 무척 어색해 보였다. 그중 겨우 괜찮아 보이는 8컷을 뽑아 스튜디오에 보냈다. 그리고 보정 후 사진을 받았다. 나 같지 않게 심하게 보정된 사진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주름살을 모두 제거해 달라고 했더니 정말 상당 부분 팽팽한 얼굴과 목의 모습으로 왔다. 그 많은 주름살을 일일이 제거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고마웠다.


만족한 사진을 동네방네 자랑했다. 친구와 가족은 물론이고 팀원들과 회사 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심지어 인스타그램 프로필과 카카오톡 프로필로(멀티 프로필, 사적인 프로필 용도) 올렸다. 이렇게 내 인생의 기록을 남겼다. 2023년 계획 중 하나를 실천했다.  


하루라도 젊은 날의 기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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