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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홀 Aug 22. 2023

지루한 게 좋아

20대 때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곳은 저녁 5-6시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거리는 한산했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술집, 레스토랑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10시쯤이면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여기 너무 심심하지 않아요?”라고 하며 북적거리던 서울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지내려니 좀이 쑤시지 않냐는 의미로 자주 질문을 했다. 그들은 정착한 지 좀 되었음에도 너무 심심하다고 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좋았다. 한가롭고 사람 별로 없고 조용한 그곳이 꽤 마음에 들었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친구들과 매일 저녁 만나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고는 했다. 해가 훤한 시간에 집에 들어가는 건 굉장히 어색한 일이었기에 매일 약속을 만들고 저녁을 먹고 집에 갔었다. 그 시간은 그 시간대로 즐거웠지만,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하여 마음이 힘든 적은 없었다.   

   

코로나가 엄중하던 시절에 MBTI 중 E(Extroverts)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집에만 있기가 무척 힘들었다고 증언한다. 특히 코로나 확진을 받고 꼼짝없이 집에서 격리 생활을 해야 했던 그때, 매일 베란다에 나가 앉아 있었다거나, 창문을 열고 바깥 구경을 했다거나 하며 갇혀 지내는 시간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를 얘기했다. E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함부로 나다닐 수 없었던 고통에 대해 ‘누가 누가 더 고통스러웠나?’ 내기라도 하듯 토로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집순이 생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음을 반대로 얘기했다. 평소에도 주말이면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었고, 학창 시절에는 며칠씩 대문 밖을 나서지 않은 날도 많았기에 집에 있는 것을 갇혀있다고 여겨본 적이 없다.      


I(Introverts)의 성향이 거의 90%에 달하는 나는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과 만나 수다 떨고 밥 먹고 노는 것도 좋아하지만, 매일 그럴 수는 없다. 20대 때 주 6일(그때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했다.)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다닐 때도 일요일은 집에 있었다.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날이 필요하다. 혼자 있으면 할 일이 많다. 빨래와 청소를 하고 책 읽고 일기 쓰고 음악 듣고 낮잠 자고 웹툰이나 웹소설 보고 인스타 피드를 읽고 뉴스를 읽고 등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어떤 날은 종일 누워서 빈둥거릴 때도 있다. 뭔가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허송세월하는 시간을 보낼 때가 더 많다. 가끔은 하루가 아깝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이렇게 멍하게 보내는 시간을 보내고 나야 좀 쉰 것 같다. 최근에는 ‘걷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일요일에도 나갔다. 혼자 정처 없이 떠돌 수는 없어서 화실에 가는 날로 정하고 그림을 그린 후에 주변을 걷거나 카페에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것도 몇 개월 하다 보니 피곤했다. 쉬는 거 같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절실했다. E 성향의 사람은 아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느긋하고 한가하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일. 남들이 보면 무척 따분해 보이겠지만, 난 지루할 틈이 없다. 지금, 여기 13년 만에 다시 찾은 뉴질랜드, 무료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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