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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2025. 11. 1

by 지홀

거의 1년 만에 걷기 모임에 참석했다. 공지 모임이 뜰 때마다 가고 싶었으나, 다른 일정이 겹쳐서 못 갔다.

올해 환경운동연합의 걷기 모임은 한양도성 순성길 완주가 목표다. 오늘이 마지막 코스인데 처음으로 참여했다.


흥인지문에서 10시에 모였다. 작년에 4~5명 정도가 참여했고, 올해도 그 정도 인원이었다는데 오늘 코스에는 무려 10명이 왔다. 담당자는 역대급으로 모인 인원에 감격해했다. 코스는 흥인지문에서 광희문, 남산성곽을 지나 숭례문까지다. 한양도성은 전체가 18.6km에 달하는데 하루에 완주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어색함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도성의 멸실구간인 흥인지문 구간을 지나며 동네 곳곳의 카페와 집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눴다. 본격적인 순성길 걷기는 장충체육관에서 N서울타워와 백범광장을 지나 숭례문까지였다. 500 계단을 비롯해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숲 속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남산산악회 건물에서 중간 휴식을 취한 후 출발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순성길로 갈 수 없었다. 나무데크 공사로 출입이 일시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도로 산을 내려와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빙 둘러 걸은 탓에 예상보다 걷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이런 돌발상황이 생기면 미리 확인하지 못한 주최 측 탓을 하는 사람이 보통 한 두 명은 있는데, 이 모임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조금 일찍 가든 늦게 가든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 좋았다. 오히려 구석구석 볼 수 있음을 좋아했다.


열 명이 함께 걷지만 걷는 속도가 전부 달랐다. 맨 앞에 가는 사람과 맨 뒤에서 오는 사람의 간격이 꽤 멀었다.

맨 앞에 가던 사람이 중간중간 발길을 멈추고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려줬다. 기다리던 사람은 뒤에서 오던 사람이 먼저 앞선 후 뒤따라 걸었다. 자연스레 구간마다 앞선 사람과 뒤처진 사람이 달라졌다. 계단에 강한 사람과 평지에 강한 사람 등 걷는 순서는 계속 바뀌었다. 같이 걷게 되면 얘기를 나누고 혼자 걷게 되면 주변 숲을 둘러보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어쩌다 보니 모두 따로 걷고 있었다. 인생길이 혼자인 것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이라는 걸 이미 다 아는데 걷는 모습을 보자니 새삼 다시 깨닫는다. 주위에 가족, 친구가 있어도 서로의 인생길을 걸어줄 수 없다. 걷는 일은 오롯이 자신이 해야 한다. 함께 걸으며 기운을 북돋워줄 수는 있을지언정, 길에서 겪는 힘들고 아프고 즐거운 시간은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걷기에 앞서고 뒤서는 순서가 생기듯, 우리 삶도 순서가 매겨진다. 먼저 성공하는 사람, 뒤늦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고 먼저 죽는 사람과 나중에 죽는 사람이 있다.


나는 무리의 앞에서 걷다가 주변 사진을 찍느라 맨 뒤로 처지자 걸음을 빨리하여 중간쯤에서 걸었다. 뭐든 맨 뒤에 있는 건 불안하다. 일행과 멀어질까 두렵고 뭔지 모를 위협이 뒤에서 덮칠 것 같다. 그래서 산행할 때 가능한 앞에서 가려고 한다. 그래야 덜 힘들다. 정상에 먼저 오른 뒤 쉬는 시간도 더 길게 만끽할 수 있다. 뒤에서 걸으면 앞선 사람을 따라가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 길이 더 힘겹게 느껴진다. 맨 뒤가 싫은 건 나의 본능인 것 같다. 학창 시절 꼴찌가 되기 싫어 벼락치기로 공부했다. 그러면 중간은 되었다. 미리 예습, 복습을 했더라면 더 좋은 성적을 냈겠지만, 그 정도로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가을단풍의 절정은 N서울타워 근처에 다다랐을 때 나타났다. 샛노란 은행나무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잎과 아직 초록빛깔이 남아있는 나뭇잎의 조화가 정말 예뻤다. 덩달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완연한 가을 하늘이었다. 사진 스폿이라며 다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기 바빴다. 남산 팔각정을 지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었다. 백범광장에 이르자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힐튼호텔의 철거작업 모습이 보였다. 힐튼호텔 건물 모양대로 가림막을 설치하고 중장비들이 동원되어 건물을 무너뜨리는 중이었다. 소음이 꽤 컸다. 제법 조용한 숲길을 걷다가 다시 도심 속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게 되자 어디 먼 곳을 여행하다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다.


숭례문에 도착해 스탬프를 찍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장장 4시간을 걷고 먹는 참치김치찌개와 갓 지은 돌솥밥은 정말 맛있었다. 밑반찬으로 김치, 단무지, 콩자반이 나왔지만 다들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김치찌개만으로 밥 한 그릇을 뚝딱 먹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헬리코박터균 치료제인 항생제 부작용으로 변비를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룽지까지 싹 먹었다. 뱃속이 편치 않아 식욕도 입맛도 없었는데 무려 2만보를 걷고 난 후라 그런지 아주 맛있게 먹었다. 게다가 가격은 만 원. 가성비가 아주 좋은 식당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밥 먹은 후 카페까지 갔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북창동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다고 하여 따라나섰다. 1층에 위치한 카페는 작았으나 2층에 제법 큰 공간이 있었다. 특이한 건 '청음실'이 있어 아무나 들어가 음악감상을 할 수 있었다. LP, CD를 들을 수 있는 곳이란다. 우린 2층에 자리 잡았다. 커피나무 토양에 따라 커피맛이 달라진다는 얘기부터 기후변화 우려,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독재, 우리나라 국민의 우수함까지 밑도 끝도 없는 화제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위가 어둑해져 시간을 보니 5시가 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내심 놀라웠다. 아마도 '환경운동연합' 회원이기에 갖는 공통의 화제와 비슷한 가치관 때문이었을 것 같다.


카페를 나서자 비가 내렸다. 비 예보 없는 날이었는데. 화창한 가을날씨를 즐긴 후라 비가 반갑지 않았다. 우린 언제 만날 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엇, 그런데 서로 이름을 묻지 않았다.


DDP 후문에서 본 하늘. 광희문, 신라호텔 뒷편 성곽길 (10:27, 10:35, 11:16)
남산 순성길 전망대, 남산성곽 (11:24, 12:16, 12:41)
제일 예뻤던 단풍 전경 (12:47)
남산의 아름다운 단풍 (12:49, 13:1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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