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또 보드마카는 안 나오는 거야
2024.12.15 (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아 1시간 가까이 동생과 목욕놀이를 하고 나와
나른한 몸으로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 첫째
(첫째는 꽉 채운 5살 오춘기 소녀이다.)
“엄마~ 이거 그렸어요. 봐봐요.”
.
.
“어머 이게 누구야, ㅅㅇ아 정말로 네가 이걸 그렸어????”
어디서 보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안다.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보고 왔겠지)
최근에 아이들을 사로잡은 산리오 캐릭터들 중 한 명인 쿠로미였다.
머리띠인지 뿔인지 모를 볼록한 머리 장식에,
옷 레이스에 팔과 다리까지 제법 섬세하다.
안 그래도 어젯밤, 아이들과 산리오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와 남편이 캐릭터들을 모두 살펴보고는 그중에 쿠로미가 가장 좋다고 했다.
뭔가 블랙의 스산한 분위기에 흘겨보는 게 건방진데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냥 말 안 듣는 우리 딸들 같았다.)
엄마와 아빠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준 큰 딸.
기특하게도 몇 번 보더니 혼자서 스스로 밑그림을 그려내었다.
몸통 옆에는 치렁치렁한 엘사드레스 느낌의 망토까지....
(남편이 지어준 작품명 ‘빈센트 반 쿠로미’)
잘 그리고 싶어 안달이 난 첫째는
본인의 작품(?)에 하나라도 성에 안 차는 게 있으면 온몸으로 불을 뿜어내는 공룡이 된다.
밑그림을 그렸을 때까지는 평화로웠다.
본인이 해냈다는 자만감과 엄마의 놀라움이 섞인 칭찬까지
자만감과 칭찬의 콜라보는 채색이 시작됨과 동시에 와장창 무너졌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야야아아아ㅏ아아아!!!!!!!!!!”
또 시작이다.
보드마카로 채색을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옆에서 다 해줄 수만은 없는 노릇.
언제나 그렇듯
잠깐 아이를 진정시키고 보듬어 준 뒤 다시 해보자고 격려를 준다.
글로 적으니 별거 아닌 듯 하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꽤나 긴급상황이다.
아이의 흥분이 한 번에 꺼질 수는 없다.
가스레인지 불 조절하듯 적당히~ 조절하며 이해주는 듯하다가도,
도가 지나치면 행동을 잡아줘야 한다.
역시나 오늘도 흥분을 제어하지 못한 첫째는
보드마카로 시작된 소동에서 시작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참아내지 못하고
뿜어내고 또 뿜어내다가 결국 엄마와의 독대를 가졌다.
“엄마가 그려!!!! 엄마가 연습해서 색칠해!!!!!!”
유난히도 뾰족한 말을 자주 뱉는 요즈음이다.
오늘은 진심으로 첫째의 기세를 꺾어 내리라 처음으로 다짐까지 했다.
사실 실패한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한 시간 정도의 독대 후 그녀는 무슨 일이었냐는 듯 평온하게 잠이 드셨다.
쿠로미야, 너는 내 마음을 알까
아니면 우리 첫째의 마음이라도 알아주련...
아이와 한참의 실랑이를 끝내고 그녀가 잠이 들자
나는 혼자 거실로 다시 나와 첫째가 그린 쿠로미를 카메라로 찍어 두었다.
쿠로미의 눈이 유난히도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다.
그래 너는 나를 위로해 주면 좋겠다.
잘 자라 쿠로미
(쿠로미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원래 이렇게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