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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일 Oct 15. 2024

난 역시 꼰대인가 보다.

난 역시 꼰대인가 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에서 돈이란 매력 있는 것이고 필수 불가한 것이다. 돈이 없으면 삶이 어려워지고 먹는 것이 다양하지 못하고 사고 싶은 욕망에서 제한을 받는다. 돈이라는 것 얼마나 좋으면 매주 로또복권방은 만원이다. 심지어 용인의 어느 곳은 로또복권방 때문에 진입하는 도로 확장도 했다. 당첨될 확률은 날벼락을 살면서 세 번을 맞을 정도로 적다. 하지만 선한 목적으로 열심히 구매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돈이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바꾸어 생각하면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일까? 돈이 필요함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소유를 많이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살아가는 년 수가 많아질수록 돈이 많아서 좋아진 것보다는 안 좋게 결론 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돈의 문제는 가족에게도, 형제간에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많다. 돈이란 일만 악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는가?

 

  태어나면서 가난한 집에 태어남은 불행의 시작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도 모자라서 가난이란 굴레는 학교생활에서 왕따를 당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언제나 공납금은 밀려서 선생님의 독촉과 교실에서 수업 대신 집으로 돈 때문에 쫓겨나는 일이 일상이 된다. 아침밥은 시간이 없거나 배가 불러서? 아니면 다이어트가 아니라 쌀이 없어 금식이다. 배가 고파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사람은 내가 배고파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배가 고파도 말하지 못했고 학교에 낼 기성회비든 공납금이든 주기 전에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살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겪어야 했던 아픈 과거다. 계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가정환경이 날 입 다물고 살게 했다.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힘이 없는 날 위로해 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결혼이란 인생의 중대사를 성사시키려고 해도 역시 돈이 필요하다. 가난한 집에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 생활로 지참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그나마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오막살이집을 블록 집으로 새롭게 변신하는 데 일조를 하다 보니 정작 결혼에 필요한 돈은 별 없었다. 그래도 미룰 수 없는 처지를 어찌하겠는가? 지혜가 뱃속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 방법은 없었다. 돈은 벌면 되는 것이다. 생각하고 무모하게 빌려 보기로 했다. 함께 신앙생활하던 묵호 성결교회 이 집사님께서 담보도 없이 믿고 덥석 돈뭉치를 신문지에 싸서 가슴에 안겨준다. ‘어차피 빚이 있는데 이 돈 더 있다고 문제 있겠어요. 저 결혼하겠습니다.’ 빚은 갚으면 된다고 큰소리치며 결혼하겠다는 아들 용납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생각해 보며 웃음이 나온다. 

 

  ‘강원도 너무 멀고 부모님 보고 싶어도 쉽게 올 수 없다’와 ‘너무 말라서 건강하지 못한 것 같다.’ 할머니 말씀을 전하며 어쩔 줄 모르는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정보가 없던 시절이라 가난뱅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지금 생각하면 다행한 일이었다. “날 믿으면 결혼하고 아니면 포기해도 돼, 결혼은 우리 둘이 하는 것이지 할머니께서 하시는 게 아니잖아?” 큰소리치며 천사를 품에 안은 철없던 시절 그걸 말이라 믿고 평생 반려자가 된 아내가 바보 같다. 무슨 인생 시나리오인지 모르겠다. 결혼 준비는 손수 했다. 사진관에서 사진을, 예식장에서 예복 빌리기, 장소는 교회에서 간소하게 거행했다. 결혼 후 백수인 현실 앞에서 신혼여행을 시내버스로 다니며 아름다운 아내의 패션을 많은 사람에게 선보였다. 고급 호텔은 이름만 외우고 작은 모텔에서 밤을 보내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소설 같은 삶에 동참해 주고 아직도 같은 공간에 지내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하며 눈에 무엇이 보여 캄캄한 길을 따라왔는지 궁금하다.

 

  경력 인정받으며 대리로 토목회사에 입사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용어도 모르겠고 적응도 어려웠다. 낮에는 현장 밤에는 책으로 살았다. 집념이 무섭게 작용했던 시절이었다. 대리 1년에 과장으로 진급했다. 파격적이다. 열정으로 무엇을 성사했다기보다는 생존으로 감사하며 살았다. 새벽 5시에 기상하고 버스로 출퇴근했다. 첫 현장이 다행히 서울 지하철 현장이라 거리가 멀고 도보로 20분 걸어야 했지만 대중교통은 가능했다. 보여주기가 아닌 진심으로 현장에서 살았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현장을 사수했다. 노력의 대가는 충분한 보상으로 돌아왔다. 과장 1호에 지하철 현장소장이라는 직책이 맡겨졌다. 사장의 배려와 인센티브가 늘 마음에 자부심과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었다. 경험도 부족하지만 무작정 도전했던 토목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돈이 흔해 유기농, 우리 밀, 유정란, 등 부자 연습시켜 준 동료와 작업자에게 감사한다. 날 미칠 정도로 현장에서 살게 한 것이 돈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돈이란 내가 원한다고 내 손에 잡히는 주변에 흔한 공기가 아니다. 어쩌면 공기처럼 잡혀는 있지만 모르고 있거나 양을 알 수 없어 자꾸 허우적거리며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많으면 좋은 것 같지만 살아보면 꼭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 날이 온다. 필요한 정도면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가난에 처해 배도 고파보았고 돈이 흔해 고객 접대는 룸이라야 되는 줄 알았던 시절도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고 이제는 내려놓고 정리를 하나하나 해야 할 시간이 왔다. 함께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아내가 고맙고 주변에서 도움 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돈이라는 재물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더 큰 선물이었다. 결혼과 돈이 결부된 요즘 세태를 보며 씁쓸함을 느낄 때가 있다. 역시 난 옛것이고 고리타분한 꼰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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