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에게 억지로 강탈한 케이크'
"엄마, 감사해요."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1교시 수업을 마치고 본 핸드폰에 생각지도 않았던 작은 아이의 문자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요즘 시크하라면 둘째가 되기도 힘든 사춘기 소녀가 웬일인가 싶어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이어서 이 문자가 와 있었다.
"학교에서 억지로 보내라고 보내 거예요. 정말이에요."
굳이 이런 문자는 왜 보낸 거야. 안 보내도 되는데 말이야.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어보았다. 원래 마음이 따뜻한 둘째는 학교에서 시키지 않아도 평소에 나에게 살갑고, 중학생인데도 미소와 달달한 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멋쩍은 표현을 아침에 보내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걸까. 굳이 진한 변명을 나에게 보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읽을 사람도 없는 답장을 마음으로만 보냈다. 그리고, 속으로 웃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은 미리부터 부모님과 식사를 한다, 선물을 산다 등 바쁜 날들을 보내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똑같은 날을 보냈을 내가 올해는 굳이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다. 엄마의 전화벨 소리가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서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효'를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부모의 귀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나는 깊이 알고 있다. 사람의 사정은 다양하고, 가정의 형태와 색은 그 색의 깊이와 농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르다는 걸.
"오늘 어버이날인데, 두 딸들 뭐 없니?"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앉은 아이들을 보면서 이 말을 건네는 나를 보더니, 큰아이가 "케이크 하나 썰까요?"라고 한다. 난 기다렸다는 듯이 "좋지, 좋지."라고 했다. 늘 사용하던 앱을 열더니, 작은 아이에게 "언니한테 2만 원 보내."라고 하고는 바로 주문을 들어간다. 이런 모습을 보는 자체가 내게는 즐거움이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내 무거운 가슴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나도 이제는 누군가의 딸보다는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세월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이날만 되면 왜 죄인이 되는 느낌이 들지. 장녀로 태어나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릴 적부터 늘 가족과 형제를 챙기면서 이날까지 살아왔다. 생각해 보면 '잘해야 한다'라는 말만 들었지, '수고했어'라던가 '고생했어'나 '고마워'라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익숙해진 듯하다. 이제는 그 상황이 질리고 나 자신이 안쓰럽다.
얼마 전 막냇동생이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나에게 대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인데 그 자리에서 당연히 다들 공정하게 정리가 될 줄 알았던 그 상황이 '내가 인색하고 인정머리 없는 언니'가 되는 분위기에서 종료되었다. 그 이후 어느 누구도 나를 이해시키거나 동생을 나무라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때 알았다.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는데, 그 둘을 섞으려고 노력했던 물거품 같은 노력을 50년 이상 하고 살았다는 것을. 한심한 나 자신을 이제는 내려놓아야겠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양한 가족이 살아가고 있다.'
교과서에서 말하는 형태의 가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기도 하고, 그 새로운 가족이 원래의 가족보다 낫기도 하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감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기도 한다. 가까워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건 상처를 주게 된다. 그건 아픔을 만드는 미련한 행동이다. 서로가 가시를 지닌 고슴도치라면 조금의 거리를 두고 지내는 걸로 마음을 정하면 좋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내가 그런 것 같다. 잠시 동안은 불효자의 삶을 살아볼 것이다.
내 삶도 소중하니까.
두 딸이 준비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었다. 그래도, 50년 동안 효를 실천한 나의 반쪽 생애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나에게 보물처럼 다가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행복을 전해주는 우리 두 아이에게 감사를 보냈다.
"사랑한다, 보물! 고마워. 엄마가 더 잘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