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치 세가지
사실 유학을 어렵사리 결정한 다음부터는 꽤나 들떠있었던 것 같다. 유튜브로 영국 유학 브이로그나 여행기들을 괜히 찾아보고 그 영상들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설레어 하곤 했다. 어떠한 복잡한 현실감 따위 보단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나를 먼저 찾아왔다. ‘그래, 남들은 다 좋겠다고 말하는데, 좋은 기회지. 이만한 기회가 없어. 경험은 돈주고도 못산다 하잖아? 좋은 경험이야.’ 스스로를 설득해가던 나날들에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나의 행복’이었다.
한예종 시험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 세가지’를 답하는 항목이 있었는데, 우습게도 지금 내 기억엔 세가지 중 어느 하나도 없다. 흔히 ‘입낳괴’라고 한다, 나 같은 사람을. 입시가 낳은 괴물이라고.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골라서 할 줄 아는 사람. 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 해낸 창조적 답변이면, 그것이 곧 나의 내면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들의 틀에 나를 짜맞춰 넣는 것. 그것은 내가 아주 잘 하는 것이었다. 이 대학은 여성스럽고 청초한 스타일을 좋아하니 이런류의 작품과 저런식의 스타일링을, 저 대학은 당차고 똑똑한 학생을 좋아하니 이런식의 답변과 저런식의 동선을. 나는 아주 똑똑했고, 대학별 선호하는 이미지와 합격 유형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강점이었고, 동시에 나의 패인이었다. 또한 입시를 실패하고 꿈마저 포기 해버린 후, 스스로를 마치 껍데기 같다고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꿈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위기에도 강하다고 믿어왔다. 목표만큼 뚜렷한 삶의 의지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꿈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고, 여러 역경에 꺾이기도, 흐릿해지기도, 그러다 결국엔 멀어지기도 했다. 꿈은 단지 ‘꿈’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크게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중요한건 ‘나 자신’이었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흔히 들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잃어선 안된다고. 그 말의 의미를 몸소 느끼게 된건 열아홉도, 스물도 아닌, 꽤나 시간이 흐른 뒤인 것 같다. 진정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명확해지는 말의 의미들이 있다. 시간이 끌고 가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진리가 있다.
꿈을 잃은 나는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고, 이 공허함을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다. 그러던 나에게 스무살의 유학은 보상의 일환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망가져버린 꿈은 뒤로 하고 또 다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회.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 나는 소중했던만큼 무거웠던 꿈의 자리를 ‘유학’이라는 또 다른 가볍지 않은 결정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이 내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무거웠음을 깨달은 것은 어리석게도 영국에 도착한 직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