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오렌지색
나를 표현하는 색깔이 있다면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
한때 홍대에서 유명한 점을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거실 같은 공간 한가운데 하얀 책장 같은 곳에 예쁜 병들이 색깔별로 줄지어 있었다. 병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고, 그 자체로도 묘한 매력을 뿜어냈다.
점쟁이는 내게 말했다."좋아하는 색을 골라보세요. 몇 개든 괜찮습니다."
나는 고민 끝에 노란색, 오렌지색, 빨간색, 하늘색, 연두색, 그리고 마지막으로 녹색을 골랐다. 색깔을 하나둘 꺼내어 놓으니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더니 점쟁이가 내 생년월일을 물어보며 무언가를 적더니 자신이 가져온 색깔 병들을 꺼내 놓았다. 그 병들은 흰색, 오렌지색, 그리고 노란색이었다. 병에 담긴 색의 양도 각기 달랐다.
그 사람은 내게 말했다."당신은 주황색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네요. 이 색은 주목을 받고 주변에서 시기를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여자가 많은 직장에서라면 더 힘들 수 있겠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내 속을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일했던 항공사와 여행 업무 부서에는 정말 정말 여자가 많았고 , 그 속에서 느꼈던 스트레스는 설명할 힘도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색깔, 특히 오렌지색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색은 빨간색, 검은색, 흰색, 네이비 같은 원색 계열이었다. 네이비색과 빨간색이 나에게 잘 어울린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점쟁이의 말을 떠올리며 돌아보니, 주황색과 노란색이 내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주황색을 거부하며 살아온 것 같다. 누군가의 시선을 끌거나 눈에 띄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조용히, 튀지 않게 살아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가끔은 내 안의 주황빛이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특별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 순간들이 이제는 그립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원 졸업식에서 졸업 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사진사님이 말했다."가운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석사모도 너무 멋지세요."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야외촬영을 마치고 들어오는 다른 학생들까지 거들며 " 뭔가 평상복처럼 찰떡같이 어울리는 이 느낌은 뭐지" 하며 웃으며 "정말 잘 어울리세요"라고 말했다. 사진사님은 다른 학생들보다 내 사진을 더 많이 찍으셨고, 비서까지 제쳐두고 직접 나서서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졸업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그 가운 위에 석사후드가 오렌지색이었다.
'아, 또 너구나. 오랜만이다, 오렌지색.'
그 순간 오렌지색이 반갑게 느껴졌다. 한동안 나와 멀어졌던 색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울려주어서 고마웠다. 예전에 그토록 거부하던 오렌지색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렌지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내 색깔을 감추지 않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 있게 살아가고 싶다. 오렌지색처럼 밝고 따뜻한 나에게 오랜만에 미소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