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를 읽고
현대 교육은 어떤 교육인가? 이에 대해선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렵다. 교육철학과 교육방식은 각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인도, 미국 등 지구상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들은 단연코 ‘능력주의 교육’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능력주의 교육이란 무엇인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은 경쟁을 통해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나중에 더 높은 지위, 더 선망받는 직업을 얻어 사회계급의 최상층에 자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어찌 보면 조선시대의 과거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능력주의 교육관은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고 여러 번 문제가 제기되어 왔으나 끝끝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정말 능력주의 교육은 정당한가? 그것이 문제이다.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는 현대 한국의 교육을 ‘야만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그는 ‘경쟁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적대적이고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든다.’라고 주장한다. 능력주의가 불평등과 갈등의 주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엘리트 세습> , <공정하다는 착각>같은 책에서도 능력주의 교육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상류층의 부와 지위를 세습하고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능력주의 교육은 그것 외에도 큰 단점이 있다. 바로 ‘교육의 본래 의미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런 말을 했다. “무지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 무사유는 범죄다. 무지는 지식의 부정 혹은 부재이지만 무사유는 의미의 부정 또는 부재, 즉 외부 세력에게 나를 지배하도록 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교육의 의미를 아주 잘 나타내 준다고 본다. 교육이란 단순히 선대의 인간들이 정립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란 한 사람의 성장을 뒷받침하는 토대이며, 그를 통해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는 방식’을 계발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며 이것이 바로 성장이다. 교육은 성장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당신이 말하는 교육을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을 경쟁에 부친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아니다. 경쟁한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정한 기준. 사회가 정한 기준. 그 기준을 더 잘 달성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는 것이 경쟁이다. 그리고 이는 그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말과 같다. 진정한 교육은 자신이 스스로 탐구하며,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호기심을 등불 삼아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열을 가리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우열을 가리는 기준만을 향해 달리게 된다. 이는 교육을 왜곡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짓이다. 역사 시간에 찰스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를 배운 적 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우열을 나누어 더 우월한 인간을 교배시킴으로서 사회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이에 동조한 우생론자들은 미국, 유럽 등지에서 집시, 흑인, 유대인 등 ‘열등인종’들을 죽이거나 불임으로 만드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결국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특정한 기준을 들이대어 더 뛰어난 인간을 선별할 수는 있다. 그러나 Allmighty는 없다. 데이비드 울퍼트(David Wolpert)가 1996년에 제시한 ‘No Free Lunch Theorem(NFL 정리)’에 의하면 모든 문제에 대해 최고의 성능을 보이는 단일 알고리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회다윈주의와 우생론의 맹점이다.
결국 현대 능력주의 교육철학은 잘못되었다. 교육에 경쟁을 도입한다면 자유로운 교육이 사라진다. 사회가 정한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인간에게 특혜를 주고 이것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교육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불이익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에 기회와 노력을 낭비한다. 진정한 교육은 무엇을 잘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육은 스스로 매진할 기준을 선택하게 만든다. 진정한 교육은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