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0
다음 생에는 비즈니스 석을 탈 수 있게 해주세요
준비 과정은 다음에 자세히 소개하도록 하자.
워킹 홀리데이를 가기로 마음먹고나서 정말 시간이 미친 듯이 빠르게 흘러갔다. 집을 비워주기 위해 이사를 가며 끙끙 짐을 옮기던 때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인천공항 앞에 28인치 캐리어 2개, 기내용 시나모롤 캐리어 하나, 짐으로 가득 찬, 누가 봐도 이만큼의 용량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닌 미어터질듯한 시나모롤 에코백까지 든 내 모습이 있었다. 얼떨떨하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만큼의 짐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 본 일이 없었다. 그리스에서 두 달 살기를 마치고 들어오며 집채만한 이민 가방 하나를 꽉 채워 한국으로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아마 이렇게 짐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치 이민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가방 사이에 잔뜩 둘러싸인 나를 약혼자인 스칼렛이 공항으로 배웅해 주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일이 많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을 일 년씩 혼자 먼 타지로 나가도 괜찮다고 동의해 준 것, 오피스텔 계약 만료 후 짐을 그의 집으로 옮겨 이사할 수 있게 해 준 것, 기타 등등. 그전까지 내가 없으면 슬퍼서 우는 거 아니냐며 깔깔거리고 그를 놀리곤 했는데 막상 출국을 앞두고서 이틀 내내 밤새 찔찔 운 것은 나였다. 그는 나에게 슬퍼하지 말라며, 좋은 일로 가는 거고 가서 잘 될 일만 남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도 행복해지기 위해 가는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여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공항으로 나를 배웅나온 것은 약혼자 스칼렛뿐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브라키오 양. 내가 출발하는 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에서 코딩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회사원에게 목숨과도 같다는 반차를 쓰며 새벽같이 일어나 나를 공항으로 배웅하러 나왔다. 가서 잘할지 걱정이 된다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중학생 때부터 사고뭉치였던 내가 그녀를 걱정시켰던 일화가 아주 많기 때문일 것이다. 본인은 T라고 매번 주장하면서도 아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브라키오는 내게 있어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같은 회사 동료 출신의 살구 양. 살구는 부산 출신으로, 전형적인 '부산 가스나'라는 단어로 그녀를 설명할 수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가장 긍정적인 부산 가스나의 스테레오 타입을 생각해 보라. 그것이 살구이다. 때로 퉁명스럽고 귀찮은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고 해 언뜻 보면 투박하고 냉정해보일 수도 있지만, 그녀를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만큼 정이 많고 따수운 사람이 없다는 걸.
나는 살구를 위해 꽃다발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살구는 그것을 잘 말려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두었다가 프리지아 향 왁스 타블렛을 만드는 데에 사용해 내 배웅길에 선물로 들고 왔다. 왁스 타블렛이 든 상자 안엔 프리지아가 '새출발'이라는 꽃말을 담고 있다는 짤막한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얼마나 따뜻한지!
우리는 살구의 미들네임이 사실 '스윗'일 거라며 인천공항 2층에 있는 카페에서 마지막 담소를 가지며 웃었다.(반차를 내지 못한 내 약혼자는 여자들끼리 뭉치기 전에 빠져 주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고, 친구들과 헤어져 출국장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 뮌헨으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탔다. 환승을 포함해 15시간 30분 정도의 일정으로, 경유 비행기치고는 아주 괜찮은 시간이었다. 비행기를 예매하기 위해 찾아보던 중, 루프트한자가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리뷰를 읽게 되고, 큰 걱정에 비행편을 바꿔야하나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는데 걱정과는 다르게 루프트한자 지상직과 캐빈 크루분들 모두 친절하셨다. 다만....내 생에 살며 그렇게 요동치는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중간에 난기류를 만났는지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처럼 출렁이고 기체가 흔들렸는데 걱정되는 마음은 나뿐인건지 주변의 어떤 승객도 불안하거나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난기류를 만났으니 안전 벨트를 메고 가만히 앉아있어 달라는 기내방송조차 나오지 않았다....승객을 이토록 강하게 키우는 항공편은 내 생에 또 처음일세. 결론적으로는 무사히 도착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내식은 총 두 번이 나왔고, 기내식과 기내식 사이에 간식 개념인지 스낵이 한 번 더 주어졌다. 첫 번째 기내식은 비빔밥이었다. 승무원 분께서는 메뉴 선택권이 없어 죄송하다고 연신 승객들에게 사과를 하셨지만 루프트한자의 비빔밥은 꽤 준수한 맛이었다. 먹으려는데 옆자리의 독일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먹는 법을 모르는지 참기름을 넣지 않고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매의 눈초리로 힐긋힐긋 보고 있다가 결국 말을 걸고야 말았다.
"그거 먹어본 적 있어?"
"아니, 처음이야."
"거기 있는 노란 소스, 그걸 꼭 넣어 먹어야 해!! 그게 이 음식의 알파이고 오메가야!"
고맙다며 그 아가씨가 참기름을 밥에 붓자 그제서야 속이 편안해졌고 나도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두 번째로 나온 기내식은 크림 파스타였는데, 살면서 먹어본 것 중 가장 최악의 맛이었다. 면이 두껍고 넓은 데다가 크림 소스가 전부 떡져 있었고....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겠다.
자다가, 미리 다운받아왔던 드라마 '글리'를 오랜만에 추억 맛으로 정주행하다가, 또 자다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140년같았던 14시간의 비행이 끝난 후 우리는 뮌헨 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나의 경우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 석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에 드는 추가 비용이 210만원 정도였는데, 너무 비싸다고 혀를 내둘렀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에는 그게 얼마든 간에 다음 생엔 비즈니스를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에는....비즈니스 석을 예약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이 내게 있다면 그 돈으로 이코노미 석을 예약하고 그 돈으로는 현지에는 더 맛있는 밥을 먹겠다든지, 좀 더 좋은 숙소를 예약하겠다든지.....나같은 서민들은 한 번쯤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는다.
뮌헨 공항에 내려서 바디체크를 받는데 줄이 엄청나게 길었고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엑스레이 검사기를 통과해 나온 내 시나모롤 가방에 달린 귀를 팔랑팔랑 움직여 보시는 보안 검색대 직원분이 귀여워 웃었는데 환승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해보니 웃을 시간이 아니었다. 당장 달려!
'하와이 파이브 오' BGM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며 미친듯이 뮌헨 공항을 내달렸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내가 갈아타야하는 비행기는 공항 내 전철을 타고 터미널 2로 가야만 하는 상황. 숨을 색색 고르며 전철이 오길 기다리던 내게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설마?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에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메일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연착으로 악명이 높기로 유명한 루프트한자. 7시 비행기가 8시로 연착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당시 시간 6시 45분.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연착이 고마울 때도 있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 번 연착이 두 번은 못 되랴. 7시에서 8시로 연착된 비행기는 8시에서 8시 25분으로, 8시 25분에서 8시 40분으로 계속해서 연착 소식을 알렸다. 덕분에 숙소의 호스트인 마르코가 나를 데리러 나오기 위해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시간이 미뤄진다는 소식을 전하기가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가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나를 위로해준 것이 고마웠다.
어찌저찌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정도를 날아 이탈리아에 드디어 도착했는데....어라? 뭔가 좀 이상하다?
이전에도 EU안에서 비행기로 이동해본 적이 있어 특별히 따로 여권 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탈리아 비자를 받아서 들어온 사람인데. 이탈리아에서 확인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하여 나의 좌충우돌 아메리고 베스푸치 공항 탐방기가 시작됐다. 캐리어 세 개에 짐이 잔뜩 든, 6kg는 됨직한 에코백을 들고 그리 크지 않은 공항을 종횡무진 헤매다 공항 경찰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다. 경찰 말로는, 솅겐국 비자이기 때문에 독일에 들어올 때 확인을 받았으면 굳이 이탈리아에서 다시 확인을 받을 필요는 없단다. 짐을 질질 끌고 개고생을 했는데...하지만 확인하지 않았으면 내내 불안했을테니 좋은 게 좋은 거란 마음으로 내가 한 달 간 임시로 머물게 될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숙소-더 지나서 피렌체 첸트로-까지 가는 길은 택시를 타고 가면 가장 편하겠지만 나같은 서민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피렌체는 아주 작은 동네고, 공항에서 시작하는 트램을 타면 첸트로까지 30분 안에 편안하게 갈 수 있다. 그러니 어지간히 짐이 많거나, 노약자가 있거나, 아주 늦은 밤이 아니라면 트램을 타는 것을 추천한다.
트램 티켓을 사기 위해서 티켓 기계 앞에 있는 아저씨에게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었더니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아메리칸? 묻자 맞다고 했다. 샌디에이고에서 왔다는 아저씨는 이탈리아에 교환학생 와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가족들과 다같이 이탈리아를 찾았다고 했다. 좋은 아빠인 것 같다 말하자 멋쩍어하며 딸이 좋은 아이다, 말을 돌렸다.
트램에서 내리자 나를 만나러 마중나온 에어비앤비 호스트, 마르코도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인상 좋은 마르코는 영어가 유창했으며 몇 명의 게스트가 묵는 숙소인지 묻자 마르코의 가족과 나 한 사람이 함께 지내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다. 이런!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인가 했더니 이탈리안 하숙집-좋게 말하면 홈스테이-이었군요. 신원을 모르는 여러 사람이 왔다갔다하는 것보다 안전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묵게 될 아파트는 트램 정류장에서 멀지 않았다. 깨끗하고 넓었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침대마저도 좋았다. 마르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에어컨이 고장났는데 내일이면 고칠 사람이 올 거라고, 부디 내일안으로 고쳐지길 바란다고 했다.
'내일이면 고칠 사람이 올 거다' 부분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내일 꼭 고쳐지길 바란다' 부분은?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소개받은 내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먼저 마르코의 아내, 파르디스를 위해서 한국에서 사온 노리개를 선물하고 싶어 나가서 선물을 가져왔다 말하니 마르코는 직접 고를 수 있게 물어봐도 되냐고 했다. 그럼! 당연하지. 그러자 안방에서 세 살 반, 너무 사랑스러운 꼬마 레일라가 나왔다. 레일라는 까맣고 예쁜 눈을 반짝거리며 초록색 노리개를 골랐다. 밤이 늦었기 때문에 가벼운 인사만을 나누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롯이 혼자 편히 쉬어도 되는 공간에 남자 긴 한숨이 나왔다. 비행기를 오래 탔으니 실제로 24시간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겠다마는, 체감상 스칼렛의 집을 떠나고 일주일정도 구천을 떠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행정 처리를 빨리빨리 하고 싶었던 내가 바로 다음날 아침 세무서를 예약했다는 사실을. 죽을만큼 후회가 들었다. 어쩌자고 바로 다음날 아침으로 예약했지? 하루만 쉬고 난 후였어도 좋았을 것을....
하지만 후회한다고 바뀌는 건 없었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기에.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장기간 비행으로 인천과 비행기, 뮌헨, 피렌체에서 붙은 다국적 먼지를 깨끗이 헹궈내는 것이었다. 당장에라도 기절하고 싶었기에 내일 아침 씻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샤워부스 안으로 향했다. 샤워용품들은 다 잘 갖춰져 있었지만 린스가 없었다. 이를 어쩌나. 여러 번의 탈색으로 빗자루가 된 내 머리를 손상 없이 빗으려면 꼭 린스가 필요한데. 하지만 여기는 피렌체. 한국처럼 원하면 어디서나 24시간동안 운영하는 편의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뻣뻣한 머리를 벅벅 빗으며 생각했다. 내일 사올 것, 린스, 제로콜라.
그렇게 피렌체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