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 멜로드라마도 이 정도면 욕 먹어요
누가 알았을까? 아주 평범할 줄 알았던 하루가 이토록 드라마틱해질 거라는 사실을. 삶에는 정말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어제에 이어 일기예보의 농락이 정점을 찍은 날이라 말할 수 있겠다. aka.비구름의 역습, 상편과 하편 정도로 제목을 붙일 수 있으려나.
시작은 아주 평범한 아침이었다. 요며칠동안 그랬듯 고요하게 눈을 떴다. 알람을 맞추지 않았지만 그냥 자연히 아침 일고여덟 시쯤 눈이 떠졌다. 창문 밖은 흐렸는데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예보는? 뇌우를 동반한 폭우라. 어제도 비가 온다고 했지만 흐리기만 했으니 일기예보가 또 틀렸나보다, 생각했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내리는 비극적인 신탁처럼, 때로 처음엔 피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마지막에 부메랑처럼 돌아와 뒷머리를 가격하곤 한다. 오이디푸스를 버릴 때 테베의 왕이 아들의 손에 죽을 것을 예상했을까? 대답은 절대 아님. 이번 이야기의 신탁은 바로 '뇌우를 동반한 폭우' 이다.
일찍 눈을 떠 뒤척이다보니 문득 간장계란밥이 먹고 싶어졌다. 삼일간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며 칩거용 식량을 마련한 주제에 하루도 참지 못하고 기어나가고야 마는 나의 습성이란. 곧바로 핸드폰 화면을 켜 아시안 마켓을 검색하자 첸트로 근처에 몇 군데가 있었다. 나가서 파르디스에게 혹시 괜찮다면 오늘 점심에 한국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얘기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너무 좋다고 대답했다. 파르디스와 가족들은 채식주의자라고 했다. 비건은 아니기 때문에 계란이 들어가는 요리는 괜찮다고.
신나는 마음으로 아시안 마켓으로 향했다. 사실 아직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타향살이에서 아시안 마켓을 찾는 순간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의 아시안 마켓에서 한국 식재료뿐아니라 중국, 일본, 대만, 종종 타이 음식까지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하늘이 잿빛이더니 마켓에 도착할 즈음엔 토독, 토독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귀찮아서 샤워를 하지 않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는데, 샤워를 했으면 억울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 럭키아라잖아? 긍정적 마인드로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장원영 씨라도 된 것처럼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트에 들어섰다. 마트엔 다양한 음식들과 식재료, 과자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재미있게도, 한국 브랜드의 상품이었는데 한국에서는 팔지 않는 제품도 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요구르트 맛 소주 같은 것? 먹고 싶었던 라면 몇 가지와 간장, 레일라에게 줄 한국 과자를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걱정되더라니, 여행사에서 투어 변경 신청을 너무 늦게 했다고 변경해줄 수 없다는 거였다. 나는 분명 어제 아침에 호스트에게 변경 전화를 부탁했는데....호스트인 마르코가 전화를 늦게 했거나 연락을 했는데 닿지 않았거나. 아무튼 그렇다고 선의로 변경 전화를 해 준 마르코에게 따질 수도 없는 일, 다 차치하고 그가 잘못했더라도 한 달 동안 살아야하는 숙소에서 그런 문제로 트러블을 빚고서 냉랭하고 불편한 분위기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소심한가? 그렇대도 어쩔 수 없는 일. 투어를 예매한 어플과 공급사와 투어를 진행하는 현지 회사는 계속 다른 곳으로 연락해보라며 나를 빙빙 돌렸고 감사하게도 파르디스가 이 모든 여정을 함께해 주었으며 끝까지 도울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래! 우선은 밥부터 먹고 하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머리를 흔들며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내가 파르디스와 레일라를 위해 만든 간장계란밥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1.햇반을 꺼내 그릇에 담고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이 때, 용기에 그대로 데우면 플라스틱 냄새가 강하게 나기 때문에 꼭 그릇에 덜어야 한다.(나만의 고집이다)
2.햇반이 데워지는 동안 계란을 부친다. 프라이도 괜찮고 스크램블 식으로 만들어도 좋다. 오늘은 스크램블 식으로 했는데, 절대로 내가 이 나이 먹고 계란 프라이 뒤집는 걸 어려워해서는 아니다. 정말. 진짜. Based on true story.
3.계란이 완성되면 밥 위에 계란을 얹고 간장 한 스푼을 넣은 다음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한 바퀴 둘러주면 끝.
너무 간단하고 당신이 아는 바로 그 레시피라서 실망했는가? 에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왜 이러실까.
다행히도 파르디스는 예의상인지, 정말인지 맛있다며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레일라는 정말 엉뚱하게도, 흰 밥이 좋다며 밥을 비비지 않고 간장을 뿌리지 않은 흰 밥만 먹었다. 아기들은 가끔 왜 이렇게 엉뚱한 고집을 부리고는 하는 걸까? 물론 그런 모습도 사랑스러웠음은 틀림없지만.
식사 후 우리를 위한 레일라의 특별 공연이 이어졌다. 나와 파르디스는 부엌 의자를 나란히 놓고 VIP석 1열 중앙에서 레일라의 재롱잔치를 구경했다. 공연을 하는 레일라보다 최선을 다해 박수를 치고 Bravissima! 연호하는 우리가 더 많은 체력을 쓴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좋은 엄마 되긴 너무 힘든 일이야."
"누가 아니래, 정말!"
공연이 끝난 후 우리는 땀을 훔치며 웃으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돌아와서 방 창문을 흘끗 내다보니 비가 멎어 있었다. 기묘하게도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지 뭔가? 사흘 동안 비가 온다고 해서 완벽한 동굴을 위한 준비를 다 해 놨는데, 하늘에 계신 누군가가 힝! 속았지! 하며 나를 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문득 외식 충동이 들었다. 정확히는,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다. 이럴 때 나를 도와줄 창구가 있지! 바로 네이버 카페 '유랑'. (홍보 아님!) 이 카페에는 원하는 날짜, 시간, 장소를 적고 함께 동행할 사람을 모집할 수가 있다. 동행 모집 게시판 글을 쭉 내려보자 운이 좋게도 피렌체에서 저녁 동행을 모집하는 여성분의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바로 연락을 보냈고, 재미있게도 우리는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더 인원이 늘어 결국에는 남자 두 명, 여자 두 명으로 이뤄진 즉석 저녁 모임이 결성되었다. 모인 사람들은 다양했다. 병원에서 일한다는 A씨,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 전 유럽 여행을 왔다는 B씨, 학회가 있어 왔다가 겸사겸사 여행까지 즐기고 있다는 C씨에 이태리에서 외노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일행들은 내가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너무 잘 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오늘 하루 종일 어깨가 잔뜩 치솟아있었던 것은 덤이다.
그들을 만나기로 한 곳까지 지도를 찍어 보았는데 트램을 타고 20분, 걸어서 33분이라고 했다. 적당히 선선하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아 산책 겸 길을 나섰는데,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됐다. 이어폰을 꽂고 흥얼흥얼 걷던 내게 뿔테 안경을 쓴 말쑥한 차림의 진저 헤어 남자애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는 아주 예의바른 말투로 '날 위해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뭐 때문인지 물었는데, 그는 나에게 자기가 이 근처에서 친구들과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같이 가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어라....이 레파토리, 뻔하다.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며 떠나자 그는 잡지 않았는데, 살면서 피렌체에서까지 사이비를 만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재미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한국 사이비와 멘트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지, 원.
(+어딘가 그 착장과 이름표가 낯익은 것 같아 이 순간 검색해봤더니, 역시나 '몰몬'이었던 듯하다!!!)
피렌체에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국인 맛집'이 있다. 포털사이트에 피렌체 맛집이라고 검색하면 아마 이 가게가 한국어 결과 한정으로 최상위권을 기록할 것이다. 해당 가게는 피렌체에만 무려 3호점까지 있는데, 한국인들 덕분에 3호점까지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뭐, 공공연한 비밀조차도 아니다. 매장에 입장해서 할 수 있는 이탈리아어를 쥐어짜 우리가 예약을 했음을 알렸다. 곧이어 한국인 직원분이 나와 우리를 자리로 안내해 주며 말했다. 이탈리아어를 참 잘하시네요.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잘 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유치원생 수준일텐데!
자리에 앉자 우리에게 한국어 메뉴판이 건네졌다. 메뉴판을 펼치자 거기엔 한국에서 한국 여성분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기르며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활발히 모습을 비추는 베네치아 출신 이탈리아인 방송인 A모씨의 사진이 떡하니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가게의 광고 모델인 듯했다. 아니나다를까, 옆에서 '어, 알베....' 알은척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인 코인을 제대로 탔구만.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피렌체식 티본 스테이크와 파스타, 리조또를 시켰는데, 솔직히 말하자면.....내가 상호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만 밝혀 두겠다. 유명세가 유명세를 불러온 셈이라고 해야 하나. 파스타는 그다지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는데 플레이팅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식감도 그닥이었으며, 자랑이라는 피렌체식 스테이크조차도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맛이었다. 해당 매장에 악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기에 공정하게 밝혀 두자면, 서비스와 분위기에는 굉장히 좋은 점수를 매기고 싶다. 다만 나는 두 번 가지 않겠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예비 피렌체 여행자가 있다면 비밀 댓글을 남겨 주시면 정말로 맛있는 가게를 추천해드리도록 하겠다.(해당 레스토랑에 한 푼은 커녕 파스타 한 가닥도 무상으로 받은 적 없지만.)
식사를 마친 우리는 거리로 나왔는데, 식사를 하는 내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일행들이 계속해서 '그리로 보러 가시려고요?' '거기서 잘 보인다더라고요' 따위의 대화를 나누는 점이었다. 눈치껏 따라가는 대신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지 물어본 내게 일행들은 성 지오반니 바티스타 축일이라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공식적으로는 피렌체에 살고 있는 나만이 불꽃놀이 소식을 몰랐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마를 탁 치며 좀 더 마을 소식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는 원래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가서 불꽃놀이를 감상할 예정이었지만, 사람들이 잔뜩 몰려 소매치기들의 파티가 일어날 거라는 예상에 기반한 합의를 거쳐 다음 행선지를 바꾸었다. 레푸블리카 광장 앞, 굉장히 유명한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가자고 했다. 그런데 C씨가 다른 제안을 했다. 두오모 성당이 잘 보인다는 멋진 카페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자고. 다들 흔쾌히 그의 인도에 따라 전시관인 듯한 건물의 꼭대기층에 위치한 카페로 향했는데, 엘레베이터가 열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탁 트인 멋진 옥상에서 멀리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이 보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정말 생각만해도 멋질 것 같았다. 카페 마감 시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졌다. 가게는 열려 있으나 커피 머신은 마감했기 때문에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완제품으로 나와 있는 캔이나 병음료 뿐이라나!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멋쩍게 카페를 나왔다.
"아마 직원도 사실 속으로 우리가 나가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설거지거리 늘리지 말고 나가라고 생각했을 듯."
원래 가려고 했던 레푸블리카 광장의 그 유명한 회전목마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한시름을 놓았다. 며칠간 굉장히 더웠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선선하고 테라스를 이용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테라스 옆에선 금빛 조명을 켠 회전목마가 돌아가고, 멀리서 거리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낭만적인 저녁이었다. 아리아나 그란데를 무척이나 닮은 예쁜 언니가 주문을 도와주었는데, 여기서 나의 미미한 이탈리아어 실력 탓인지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는 샤케라또를 주문하고 싶었는데, 내가 굳이굳이 샤케라또 투 샷을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맥주 하나, 샤케라또 둘, 그리고 샤케라또 더블 하나 이렇게 가능할까?"
서버 언니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일, 이 삼....오케이. 그녀는 오케이라고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런 눈빛으로 뭔가 미심쩍은 오케이를 주는 사람은 분명히 내가 원하는 거랑은 거리가 있는 메뉴를 가져다주기 마련이었다. 잠깐 수다를 떨고 있자니 오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온 것은 맥주 한 잔에 샤케라또 두 잔이었다. 샤케라또 세 잔을 시키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주문은 '샤케라또 더블' 두 잔으로 들어간 거였다. 한 잔을 더 주문하며 혹시 더블 추가금을 받는다면 내가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일행들은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한참 떠들고 있는데 가게 테라스 천막 위에서 팡, 팡 터지는 소리가 났다. 불꽃놀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황급히 결제를 하고 베키오 다리를 향해 뛰듯 걸어갔다. 도착하니 다리 위는 이미 도착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한참을 기웃거리며 불꽃놀이가 그럭저럭 보이는 장소를 찾아 자리를 잡고 나니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터지는 모습,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 누군가가 Bellissimo!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부모님의 손을 잡은 아기들도 있었다. 아마 (기억이 난다면)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우리는 감탄하면서도 한 손으론 가방을 꼭 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는 언제나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은 내가 굳이 손가락 아프게 더 적지 않아도 되리라.
불꽃놀이가 끝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나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삼 초 정도? 이탈리아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감으면 가방끈 베어가는 곳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각자 일행들과 함께 흩어져가는 사람들 사이로 우리도 슬슬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사진을 남기는데, 내 차례가 되어 사진을 찍던 중 옆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행위예술가도 많은 동네라 신경쓰지 않았는데 일행에게 돌아와 핸드폰을 넘겨받으니 다들 들뜬 목소리로 일러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내 포즈를 보고 박수를 쳐 주었다며. 쑥스러우면서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오늘 동행했던 일행들과도 즐거운 시간이었다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여행자인 그들은 SMN역 근처에 숙소가 있었지만 난 트램을 타야만 했다. B군이 남은 트램 티켓이 있다며 내게 건넸다. 이걸로 편하게 가실 수 있는 거죠? 묻는 눈망울이 순박하고 선했다.
이렇게 아름답게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이 너무 길어져서 여러분이 전술했던 신탁 얘기를 기억하려는지 모르겠다. 기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원래 신탁이라는 것이 그렇다. 모두가 잊고 있을 때쯤 다시 나타나 뒤를 후려 갈기는 것이다. '뇌우를 동반한 폭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트램 정류장에 도착하자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 따위에 쓸 신경이 없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트램 정류장에 펼쳐져있었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사백 명은 되어보임직한 사람들이 트램 정류장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 사백 명이 과장같은가? 불꽃놀이 행사가 있었고, 막차 시간과 가까웠고,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의 축구 경기가 있었다. 트램을 기다리는 중에도 절대로 이 사람들이 다 탈 수 없을 거란 생각은 굳건했는데, 정말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트램이 도착하고, 사람들이 한데 낑겨 트램 내부를 빼곡하게 채웠다. 나는 솔직히 탈 수 없을 줄 알고 택시라도 알아봐야하나, 걸으면 40분정도 걸리는데 걸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뒤에 밀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거의 끝자리에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나름 2호선, 9호선, 여타 등등 지옥철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한국 전철도 다 섭렵했다 자신하는 나였는데. 이탈리아의 지옥 트램은 차원이 달랐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하는 초능력자들이 거기 있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일단 빡빡 미는 것. 끝. 트램 안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같은 신음이 비져나왔다.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뮤지컬에 나온 바론 베레타 권총엔 총알이 열다섯 발이 들어가는데, 예비 탄창인지...어딘가에 눌러 넣으면 열여섯 발까지 쏠 수 있다고 했다. 그거랑 트램이 무슨 상관이냐고? 열여섯 발, 그리고 기적적으로 열일곱 발까지 꾸역꾸역 눌러 담은 상태였다는 뜻이다.
내가 탄 트램 정류장은 그 노선이 시작하는 곳이어서 승객을 다 태우고도 약 오 분 정도 정차해서 출발 대기를 했는데, 이때부터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모쪼록 내가 내리기 전에 비가 그치던가, 아님 하다못해 빗줄기가 좀 약해지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 때, 십 대로 보이는 남자 청소년 세 명이 저들끼리 낄낄거리다 사람은커녕 고양이 한 마리도 더 탈 수 없는 트램에 몸을 싣으려 사람들을 눌렀다.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여져있던 사람들이 폭발했다. 트램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노!' 라고 노호를 내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아주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그놈들 중 하나가 자기 우산에 맺힌 빗물을 트램 안으로 끼얹었던 것이다. 말이 좋아 '맺힌 빗물'이지, 실제론 머그로 한 컵 정도 됐을 것 같다. 그리고 불쌍한 나? 마지막쯤 낑겨들어온 탓에 문 근처에 있었고, 그 모습을 1열직관하다가....그렇게 됐다.
시끄럽고 덥고 흔들리는데다가 키가 작아 손잡이도 잡을 수 없어 정처없이 사람들 사이에 낑겨 있던 나는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듯 '럭키 아라'를 연신 떠올렸다. 아, 귀찮음이 많은 내가 비를 조금 맞으면 그냥 피곤을 못 이기고 잠들었을지도 모르는데 씻을 수 있는 완벽한 이유가 생겼네! 정말 럭키 아라자낭.....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아악!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내가 내릴 정류장에 도착하자 비가 멎긴커녕 오히려 삼류 드라마 촬영장에서 비 씬을 촬영하기 위해 어거지로 퍼붓는 가짜 비처럼 혹독하게 비가 내렸다. 우산은커녕 머리를 가릴 수도 없었던 나는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파트까지 걸었다. 그저 중요한 게 젖을까 싶어 한 손으론 작은 크로스백을 소중하게 쥔 채. 몇몇 사람이 내 주위를 뛰어서 지나쳤지만 나는 뛰지 않았다. 어차피 홀딱 젖은 꼴, 뛴다고 덜 젖고 걷는다고 더 젖을 수준이 아니었다. 삼류 멜로드라마에서도 이렇게 성의없게 비를 뿌리면 욕을 먹을 거란 생각과 동시에, 이런 비를 맞고 있는 내가 삼류 멜로드라마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디, 액션! 물론 밖에서 봤을 때는 호러 필름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네 살 이후로 천둥번개같은 걸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데, 기막힌 CG효과처럼 천둥번개도 강하게 내리쳤다. 뇌전을 맞을까 봐 두려워 떤 건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추적추적 집에 돌아와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을 트니 그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씻고 나와 오늘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일기를 적으려 하는데 너무나 졸리고 피곤했다. 하지만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나. 이건 럭키 아라가 아니라 인간승리 아라다. 오늘보다는 마일드한 맛의 내일을 꿈꾸며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