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내 기준에선 저녁 9시다. 저녁 9시 이전에 먹는 음식은 저녁이다. 저녁 9시 이후에 먹는 음식은 야식이다.
옛날엔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마다『장터』같은 지역광고 잡지가 1층에 여러 권 쌓여있었다. 아침에 가면 수북한 잡지가 저녁때 오면 하나도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직 휴대폰이 폴더 폰이던 시절, 전화번호부는 이미 사라졌지만, 이런 잡지가 없으면 배달시킬 집이 주위에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던 시절이었다.
겉표지 바로 뒤는 눈에 확 띄는 칼라로 인테리어나 가구 상점 광고가 붙어있었다. 음식점은 조금 있다가 뒤에 나오는데 음식 종류는 페이지마다 겹치지 않았지만, 동 별로 모인 구역 전체의 아파트 상가 전화번호부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다시금 앞에 봤던 음식들의 경쟁 업체가 그려진 경우가 많았다. 대개의 경우 뒤표지는 피자와 같은 비싼 음식이 차지한 했다. 사이사이에 심심하지 말라고(?) 오늘의 운세나, ‘깔깔 유머집’도 끼워 넣은 건 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책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동네 야식 미슐랭 가이드였다. 한 번도 밤에 시켜 먹은 적은 없지만, 거기에 광고비가 들여가면서 컬러 인쇄를 부탁한 요식업계 종사자들의 허리가, 지금은 배달앱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후기 쪽으로 굽혀진다.
배달 앱에서 쿠폰을 주기에 나도 야식을 시켜 먹은 적이 있다. 뭘 해 먹기가 애매했던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불을 쓰면 내가 수비드로 쪄질 것 같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때 먹은 족발과 쟁반막국수는 맛있었지만, 나는 일부 고발 프로그램에서 본 위생상태 더러운 야식집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은 그저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제품들이 많지만, 옛날엔 그저 밥이나 과자 같은 걸 사 와서 먹는 게 다였고, 감자칩은 그렇게 내 배의 둘레를 일정 부분 늘려준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은 거의 안 먹지만.
이제는 야식을 끊고 물만 마시는 처지지만, 가끔 부엌에서 라면 냄새가 풍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추위에 떨면서 라면을 냄비 뚜껑에 올려 후후 불어먹던 시절의 기억이 여름 가로등의 모기떼처럼 몰려온다.
체력 단련이 다이어트로 다시 헬스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이름이 교체되며 이 땅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야식은 건강을 재물로 삼아서 먹는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퍼지기 시작했다. 야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이제는 기회비용의 관점에서 다루게 된 것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라면을 거의 끊다시피 한 나도 누가 한밤중에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린다면 가스레인지에 스파크 튀기는 소리만으로 군침 흘릴 것 같다. 한 번 마음먹으면 식탐이 나보다 더 예민하고 더 민첩하게 움직일 듯하다.
야식을 떠올렸더니 배가 요동친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야식 먹으면 몸이 다 무너진다는데 나는 얼마나 많은 건강을 저당 잡혀야 할까. 징그럽게 달라붙는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의 깊이보다 냄비의 깊이에 더 손이 갈 듯한 밤이다.(2024.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