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도시락에 담은 망향(望鄕)

by GIMIN

할머니의 손을 잡은 채로 문산역에 내릴 때마다 누런 벼가 잘 익은 들판이 이마 위를 스치는 것 같았다. 열차의 창 밖에 펼쳐진 황금 들판에 햇빛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어디선가 나타난 새가 너른 하늘 위에서 이리저리 날았다.


아직 경의선이 도라산역까지 깔리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여기서 가려면 종착역인 문산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또 타야했다. 역 근처에 있는 버스 터미널은 그저 지붕과 기둥만 있던 건물이었고, 거기서 버스가 몇 대 머물렀을 따름이었다. 나는 손에 든 보퉁이를 들고 버스를 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2시가 넘었다. 눈곱이 잔뜩 낀 눈을 비비며 아침 일찍 서둘렀건만, 정작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국군을 기억하는 기념비를 지나 어느 다리에 도착했을 때, 외할머니께선 철조망 너머에 있는 강을 오래도록 보고 계셨고, 나는 그 옆에서 산화철이 된 철조망을 쳐다봤다.


건물 옥상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엔 기념품을 팔거나, 음식을 파는 곳도 있었다. 이상한 글씨가 인쇄된 소주병도 봤다. 전망대엔 500원 동전을 넣으면 볼 수 있는 쌍안경이 북쪽 방면으로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신께선 한 번도 그 쌍안경을 이용하지 않으셨다. 나는 500원이 있는지 없는지를 매번 눈치 보는 철없는 애에 지나지 않았다. 망원경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애였으니까.


망원경의 뒤편엔 슬라이드 필름을 볼 수 있는 기계가 있었다. 500원을 넣고, 두 눈을 두 개의 구멍에 갖다 대면, 슬라이드 사진이 보이는 기계였다. 그 안에서 본 산은 안개로 휩싸인, 옛날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여백으로 여러 곳이 생략되어 있었다.


건물을 나온 나와 외할머니는 철조망 바로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테이블이 있는 벤치였다. 할머니는 어느새 내 손에 쥔 보퉁이를 테이블 위에 풀고 올렸다. 보퉁이 안엔 도시락이 있었다. 유리그릇 안에 장조림과 건새우 볶음과 흰 밥이 들어있었다.


얼마나 맛있게 그 도시락을 먹었던지. 철조망 옆엔 이름 모를 새 떼가 노을로 물든 들판 위를 날아올랐고, 바람은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도시락 그릇을 보퉁이로 감싸시던 외할머니는 맛있었냐는 질문을 했고,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외할머니께선 잠시 건물이 있는 하늘 쪽을 휘 둘러보셨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사이로 새 한 마리가 강 너머로 날아갔다. 아마도 날갯짓 소리를 들으신 모양이었다.


그날 먹은 도시락엔 노을이 들어있었고, 철조망의 비린 냄새가 들어있었고, 임진각을 둘러싼 풍경 또한 들어있었다. 고향에 갈 수 없기에,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서 손주를 쓰다듬는 손길 또한 그 작은 도시락 하나에 다 들어있었다. 밥을 비운 대신, 그곳의 공기를 담은 그릇을 들고 집으로 향했던 추억 하나가 요즘 따라 유달리 오롯하게 되살아난다.(2024.9.17)

keyword
이전 06화살이 닿는 설거지, 삶이 되는 설거지